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1년 전 전라 좌수사로 임명되어 전라좌수영이 있던 여수에 부임하며 근무하던 중 임진왜란을 맞이하게 되고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한산대첩, 명량해전 등 23전 23승의 전승 신화를 쌓으며, 일본군이 바다를 통해 신속하게 한양으로 보내려던 식량 등의 군수품 공급을 차단함으로써 조선이 일본의 속국이 되는 치욕을 막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전공은 전남 해남에 근무하던 전라 우수사 이억기의 협력 덕분이기도 했다.

여기서 잠깐 한반도 지도를 보면 전남 해남은 한반도의 왼쪽에 있고, 여수는 해남보다 오른쪽에 있다.

그런데 왜 지도의 왼쪽에 있는 해남에 전라좌수영이 아닌 전라우수영이 있고, 지도의 오른쪽에 있는 여수에 전라좌수영이 있었을까?

 

그것은 지역을 바라보는 사람이 어디에서 보느냐의 관점의 차이다.

지도를 보는 독자의 관점이 아닌 임금의 관점에서 전라도를 바라보면 해남이 오른쪽, 여수가 왼쪽이 되는 것이다.

다음의 지도를 다시 보자.

 

이제 이해가 될 것이다. 한양에 있는 임금 위주의 관점에서 보았기 때문에 여수는 왼쪽이 되어 전라좌수영이 있고 해남에 전라우수영이 위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극적인 관점 전환의 다른 사례를 작가 김훈은 ‘흑산’이란 소설에서 보여 준다.

어린 시절 과거에 급제하며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던 황사영을 포함한 천주교도들은 자신들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으며, 착취를 일삼는 임금을 포함한 기존 질서보다는 자신들에게 희망과 꿈을 주는 천주님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며 순교자의 길을 걷는다.

나에게 주어지고 강요된, 아무 도움이 안되는 임금을 대표로 하는 전제군주적 관점보다는, 죽음을 불사하더라도 내가 선택한 행복과 희망이라는 관점의 자발적인 선택이라는 극적인 전환이 일어난 것이다.

우물 속의 개구리가 우물 밖의 더 넓은 세상을 알게 되며 코페르니쿠스적 혁신이 일어난 것이다.

이 땅의 정치인을 포함한 리더들은(특히 북한의 김정은 정권은) 국민과 주민들에게 아무 희망과 행복을 전하지 못하면서 주어진 환경과 상황에 매몰되어 국민이 기존 가치와 관점에 당연한 지지를 할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국가의 리더는 국민에게 어떤 행복과 희망을 제시하고 그 꿈의 실현을 위한 어떤 행동을 이끌어 갈 것인가를 냉철히 고민해야 한다.

개인으로서의 우리는 열린 마음을 가져야한다. 그리고 나보다 훌륭한 다른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혹은 독서를 통한 간접 경험을 통해, 여행이라는 비움과 사색의 직접 경험을 통해 스스로 자신의 그릇을 키워나가야 하겠다.

그러면서 혹시 우리가 알아 왔던 과거의 생각들이 잘못된 것은 없는지 고민하고 반성하며, 우리에게 다가오는 세상의 변화를 직시해야 한다. 또 새로운 관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변화의 흐름을 주도해야 하겠다.

 

사족 : 콜럼버스의 달걀

신대륙 항해를 마치고 돌아온 콜럼버스를 축하하기 위한 파티가 열렸다. 축하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몇몇 이들은 콜럼버스를 시기한 나머지 그의 업적에 대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며 헐뜯었다.

이에 콜럼버스는 파티에 있는 사람들에게 달걀을 세워 보라고 요구했다. 아무도 달걀을 세우지 못하자, 콜럼버스는 달걀을 살짝 깨뜨려 탁자 위에 세웠다.

이렇듯 틀에 갇혀 사고하기보다는 새로운 시각을 가지고 틀을 깨는 사고를 하면 해답을 얻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