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검사도 아니면서 대검찰청과 법원을 밥 먹듯이 드나들었는가 하면, 누구나 매일 밥 먹는 회사 구내식당은 일년 동안 한번도 발걸음을 하지 못하던 때가 있었다. 변호사가 아닌 다음에야 송사에 얽히기를 바라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만, 커뮤니케이터는 회사와 관련된 경우에는 법원이나 검찰청 아니라 더 한 곳이라 해도 간다. 그리고 밖에서 맛있는 것 먹고 다니는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매일 점심 한끼를 위해서 한 시간씩 걸리는 먼 거리를 가서 민감한 사안, 까칠한 사람을 대한다는 것, 생각만큼 유쾌하지는 않다.

 

매일 바뀌는 여론의 미세한 온도 차를 살펴라

맨주먹으로 기업을 일구고, 승승장구 하다가 국내 3대 그룹의 총수가 되었지만, IMF 즈음에 그룹은 완전히 흩어지고, 7년반 동안 해외를 떠돌아 다닌 이가 있었다. 귀국과 함께 바로 검찰조사가 시작됐다. 그것도 대검찰청에서. 모든 언론은 서슬이 시퍼런 기사를 쏟아냈다. 추징금이 23조나 되었는데, 마치 대한민국이 입은 경제손실 전체가 그 사람으로 인한 것 인양, 하루도 잠잠할 날이 없었다.

매일 아침 출근하면 먼저 전 매체 기사를 꼼꼼하게 체크해야 했다. 날카로운 기사는 빼고 웬만한 것들만 골라서 추렸다. A4지에 가지런히 보기 좋게 붙여서 자료집을 만들었다. 기사가 많은 날은 종합일간지와 경제일간지 등 전체 매체에서 가려 뽑아 만든 자료집만 해도 A4지로 40~50 페이지 정도였다. 매일 바뀌는 여론의 온도 차를 세밀히 파악하는 것이 업무의 시작이었다.

이 작업만으로도 거의 오전이 가버린다. 온라인기사도 보고 다른 자료도 정리한 뒤 점심식사 하고 잠깐 쉬었다가 2시 정도면 서초동으로 향했다. 3시께에 대검찰청에 도착했다. 매일 대검기자실을 방문하는 일도 처음엔 간단한 의도로 시작됐다. ‘출출할 때 간식 거리 좀 사 가면 좋겠지?’라는 사부님의 의견이었다. ‘호랑이 굴로 직접 들어가자’는 생각이었다.

몇 번은 치킨 몇 마리와 음료수, 가끔은 케익 같은 간식을 들고 갔다. 첨엔 기자들과 안면도 없었고, 기자실에 들어갈 명분도 없었기에 간식거리라도 핑계 삼아야 부담이 덜했다. 오후 3시가 넘어 마감 시간이 다가오면 바쁘지만 속은 출출할 때였다. 자리를 비울 수 없는 그 시간 내가 들고 가는 간식과 음료수는 환영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기자들과 함께 먹었던 적은 없다. 기자실 가운데 테이블에 음식을 먹기 좋게 펼쳐 놓고 음료수도 준비해 두면, 마감 한 기자들을 선두로 다들 달려들었다. 그때쯤 기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밖으로 나왔다. 건물 바깥 담배 피는 곳에 있으면 기자들이 오게 되어 있었다. 모 경제지 기자가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 다가왔다.

“같이 드시지, 왜 밖에 나왔어요?”

말을 걸어준 것만해도 고마웠다. 나란히 서서 담배를 입에 물었다.

“고생하시는 분들 드리려고 사온 것입니다.”

담배를 피우며 얘기를 나눴다. 기자들은 다들 내가 대우 직원 이려니 생각하고 있었다. 대우 내부의 분위기, 앞으로의 방향이나 계획에 대해 질문들을 했다. 사실, 대우에 근무 한 적도 없었기에 아는 것이 없었다. 뭔가 비밀이 새 나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나와서 이야기하던 기자가 들어간 뒤에 다른 기자가 나오면, 그렇게 또 함께 담배를 피우면서 대화를 이어갔다. 다행스러운 것은 질문 레퍼토리가 비슷했다. 처음 기자에게는 정리가 덜된 채로 답을 하지만, 반복되면 내용이 제법 살이 붙고 다듬어져서 스토리가 갖춰졌다.

 

대검찰청 경비에게 아이스크림을 얻어 먹다

대검찰청은 일반인들은 갈 일이 거의 없다. 소송을 하더라도 법원 청사나 서울지검 같은 곳은 들락거릴 일은 있지만 대검은 아니다. 대검에 갈만한 사람이면 이미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봐야 한다. 때문에 대검은 방문자가 많지 않고 출입도 까다로워서 정문에서 용건과 피방문자의 확인 절차가 있어야 들여보낸다. 처음에 몇 번은 정문 통과가 영 부담이었다. 기자에게 전화로 부탁해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경찰과 비슷한 남색 정복과 모자를 차려 입은 경비에게 꼬치꼬치 질문을 받게 되면 나도 모르게 쭈뼛거리곤 했다.

그런데 그리 길지 않았다. 일주일이 조금 더 지나자 경비들이 얼굴을 알아봤고 그 뒤로는 용건을 확인하지 않았다. 약간의 연출은 있었다. 누가 뭐랄 사람도 없었지만, 삼복더위에도 항상 넥타이까지 제대로 갖춘 정장을 했고, 서초역에서 대검까지 뙤약볕에 걸어가면 제대로 땀 투성이가 된다. 그 모습에 냉정하게 대하기는 어렵다. 경비들에게도 먹혔고, 기자들에게도 효과가 그만이었다.

“어느 분을 모시는 지 모르지만, 참 그 분 복도 많다. 이 더위에 매일 이렇게 고생 해주는 사람이 있으니!”

“오늘은 너무 덥네요. 어서 들어가세요.”

“날 더운데, 사무실에서 선풍기에 땀이라도 좀 식혔다가 가세요.”

깐깐하던 경비들이 오히려 먼저 인사하고 생각해주는 말을 했다. 심지어 한 경비는 고생한다며 기어이 나에게 아이스크림을 대접한 일도 있었다. 대검 정문을 통과하면서 낯 익은 경비 아저씨한테 인사를 하고 언덕길을 걸어 올라가려는데, 나를 불러 세웠다.

“거기 잠깐만요.”

“예? 저요? 무슨 일이신가요?”

조금 익숙해졌다지만 법, 검찰, 대검, 경비 이런 단어들은 친숙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낯선 것들이었기에, 뭔지 몰라도 덜컥 겁이 났다.

“잠깐 같이 갑시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무슨 일일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정복 입은 경비가 앞장서서 걸어갔다. 불안해 하면서도 뭔가 물어볼 용기조차 내지 못했다. 한참 뒤따라 갔더니, 기자실이 있는 별관 건물 2층의 구내 식당으로 쑥 들어갔다. 그리고는 어서 오라고 손짓했다.

조사실이나 사무실이 아니라서 안도감이 들었지만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경비 아저씨는 앞에 있던 아이스크림 냉동고 문을 활짝 열고는 고르라고 권했다. 순간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간간이 군것질 거리를 들고 올 때 여분의 음료수를 경비 아저씨한테 준 적은 있지만, 대접 받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당시 유행하던 녹색 아이스크림을 하나 골랐다.

“에이, 좀 더 비싸고 맛있는 걸로 고르세요.”

“이거면 됐습니다. 너무 감사합니다만 계산은 제가 하겠습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어느 분 때문에 매일 오시는 지 모르지만, 이 더위에 고생하는 걸 보니 아이스크림이라도 한번 대접해 드리고 싶었어요. 마침 지금 교대시간이라. 하하.”

그 말을 듣는 순간 감사하다는 생각뿐이었다. 식당에 앉아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눴다. 누구 때문에 무슨 연유로 매일 들락거리는 지는 묻지도 않았고, 서로 말도 꺼내지 않았다. ‘날 더운데 뙤약볕에서 정복 차림으로 장시간 서 있으면 힘드시겠다’고 건넸고, ‘교대로 근무 서기 때문에 생각만큼 힘들지는 않다. 오히려 매일 방문하는 게 더 힘들겠다’는 대화가 오갔다. 그리고 고생하라는 말을 남기고 경비는 자기 위치로 돌아갔다.

 

힘들 때의 관계, 커뮤니케이션의 든든한 밑천 된다

‘대한민국에서 대검 경비 아저씨한테 대접 받아 본 사람이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매사 정성을 다하면 그 정성에 감동하는 사람이 생긴다. 그런 정성이야말로 진정한 커뮤니케이터의 자세’라는 생각이었다.

출입이 반복 될수록 기자들과도 친해졌다. 처음에 담배만 피우기 멋적어서 날씨 얘기나 주고 받던 대화는 어느새 고민거리나 개인사까지 이어졌고, 대검 수사 진행상황을 포함해 내부 이야기도 주고 받는 관계로 발전했다. 또, 내가 주워 들은 작은 얘기 거리에도 귀를 기울여주곤 했다.

지금 생각해도 흐뭇한 기사는 ‘회장님과 김치’ 다. 사실 대우그룹 기업내부 사안과 관련해서는 겪어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었기에 얘기 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날카롭게 날 선 여론을 돌릴 수 있다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다 우연히 들었는데, 점심 식사로 김치찌개를 맛있게 드셨다는 것이었다. 들었던 내용의 전부가 ‘회장님’과 ‘김치’ 밖에 없었다. 그룹 총수였지만 엄연히 한국 사람이었고, 정처 없이 해외를 떠돈 뒤 검찰 조사실에서도 생각났던 것이 김치였다면 스토리 감으로는 충분했다.

기자실 앞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얘기 끝에 회장님과 김치 얘기를 슬쩍 꺼냈다.

“회장님께서 해외 생활이 많이 힘드셨던 거 같아요. 김치찌개를 맛있게 드셨다고 합니다. 장 수술 때문에 해외에서 고생도 많았는데, 그런 와중에도 김치 생각이 간절했던 것 같습니다.”

회장님이 해외에서 어렵사리 병원 치료를 받았던 얘기, 고생한 얘기는 이미 기사에서도 나왔던 얘기였다. 거기에 김치 얘기를 살짝 더하니 그럴싸한 스토리 하나가 금새 완성됐다. 그날 오후 몇몇 기자들과 김치 얘기를 나눴다.

한 이틀 뒤부터 칼럼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느꼈던 감정을 기자들도 똑 같이 느꼈던 것이라 생각된다. 그렇게 여론의 날카로운 각이 조금씩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그 뒤로도 거기서 인연을 맺었던 기자들과 일년에 한두 번은 연락하고 얼굴도 보면서 지냈다. 오랜 인연도 챙기다 보니 일년 365일 중 휴일을 제외한 250일의 근무일수로도 점심 약속 잡기가 만만치 않았다. 덕분에 회사 구내식당으로의 발길은 원치 않게 못했다. 총무과 막내 여직원이 놀라서 한 이야기가 기억난다.

“와, 유령도 아니면서, 구내 식당에 연간 식사 횟수가 빵인 사람이 있어요.”

석 달 가까이 거의 매일 대검 기자실을 방문했다. 덕분에 귀한 인연도 많이 얻었다. 기자실에 있던 대부분과 술자리까지는 아니어도 식사는 한 두 차례 이상은 가졌던 것 같다. ‘발 품 팔고 직접 대면하는 관계가 진짜 관계’라는 생각이 굳어진 계기다. 그 전엔 세녹스 재판으로 몇 년간 법정에 매달 나갔으니 족히 50번은 넘을 것이다. 그렇게 알게 된 기자들은 나중에 다른 부서로 발령이 나고 승진들도 했다. 커뮤니케이션의 든든한 밑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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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매일 바뀌는 여론의 미세한 온도차를 살펴라.

2.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면 주위에서도 알아준다.

3. 힘들 때의 관계일수록 커뮤니케이션의 든든한 밑천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