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장군은 그러면 너를 데리고 온 적장은 어찌 되었느냐고 묻는 말에 우근신이 말하길

‘소인의 누이는 우리나라 수군이 돌격해오는 광경을 보고 암만해도 견디지 못할 줄 알고는 그 적장이 허리에 찬 작은 칼을 빼주며 소인의 누이동생더러 배를 갈라죽으라고 명하였소. 소인의 누이동생은 벌써 잉태 중이었는데, 적장이 주는 칼을 받아서 배를 가르지 아니하고 목을 찔러서 먼저 자살하였소.’

라고 고하였습니다.”

“음! 다음에 웅천현감 허일이 거느린 그 고을 서기관 주귀생은 고하되

‘김해부 안에 사는 노비 이수금이 7월 초 2일에 웅천현에 있는 그 부모를 보러 웅천에 와서 말하기를 김해불암 선창에 와있는 적의 수군들도 전라도 수군과 접전할 것이라는 말을 하더라고 하며 배마다 방패 밖에다가 단단한 느티나무 쪽을 세 족씩이나 더 붙여서 견고하게 만들고 수군을 세 패에 갈라서 김해성 안팎에 머물게 하였다 하며, 하루 밤은 바다에 뜬 고기잡이 하는 불을 보고 전라도 이순신의 수군이 온다고 하여 크게 놀래 떠들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동분서주하다가 얼마 뒤에야 진정하였다.’

라고 고한다. 적군 중에도 원균 같은 겁쟁이가 있었던가 보다.”

“네, 여러 사람의 공술하는 문초의 내용을 다 믿을 수 없다 하더라도 그 여러 사람의 말을 종합해보면, 적의 수군이 세 패에 나눠 갈라 가지고 전라도를 침범하여 요전 여러 번 패전한 수치를 씻으려 한 것은 사실이라는 것과 그 제1군인 42척의 3만 명이 한산도에서 부서지고, 제2군인 42척의 2만 명이 안골포에서 부서진 것을 적장들은 상상할 수가 있었습니다.”

“음! 충무공전서의 기록을 보면, 백암 원수는 매번 포로 여러 명을 문초받는 마당에 그 세밀한 태도와 자애로운 동정과 치밀하게 보는 눈이 포로들의 마음을 통찰하여 적의 사정을 읽어내 잿더미 속에서 좋은 구술을 취하고 썩은 흙 속에서 아름다운 옥을 얻으니 어허! 천추의 후인으로 하여금 이 책을 읽고 흠탄하고 추앙함을 저도 모르게 그치지 않을 것이다. 라고 기술하였고, 한산도와 안골포의 싸움에 적은 반수 이상의 수군 세력을 상실하고 예상하였던 조선의 제해권을 잡으려는 야심을 포기하지 아니하려 해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고, 그 때문에 평양에 웅거한 고니시의 군사도 더 나아가지 못하게 된 것도 알고 보면 일본군이 절반가량 날아갔기 때문이다.”

“네, 유성룡의 말에 의하면 만일 한산도승첩이 없었던들 전라도, 충청도 이북의 경기, 황해, 평안도까지 적군의 손에 들어가고 그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명나라의 요동반도 산해관, 천진 및 산동 등지까지도 일본군이 횡행하게 되어 형세가 매우 위태하게 되리라는 것은 정확한 판단이었습니다.”

“다죠대신이 된 히데요시는 육전에서 백전백승하여 나가는 곳에 대적할 자가 없는 자기네의 군사가 수전에 이순신장군의 함대와 아홉 번 싸워 아홉 번 패한 것을 본 히데요시의 분노함은 여간 아니었다. 그가 일본 수군이 패하는 이유를 알아 올리라고 엄명한 때에 히데요시에게 도달한 수군제장의 보고서에는

‘일본 수군은 병성 수효는 3, 4배 이상이나 많다 할지라도 배가 취약하여 이순신의 철갑귀선에만 부딪치면 곧 부서지고 이순신이 사용하는 무기도 정예할 뿐 아니라 군사들도 조선의 육군과는 달리 매우 용감하고 이순신이 지세의 험이와 조수의 순역을 잘 알아 그것을 교묘하게 이용함으로 타국의 객병인 일본 수군으로서는 그 모략을 대항해 낼 수 없다.’

하는 것의 주요 의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