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노연주 기자

그 남자의 일상 훔쳐보기 ▶그남자 시리즈 다시보기 링크 #파인픽스XP120 #북씨 #에이수스 비보 미니PC #켄우드 BLP900 #야마하뮤직 TSX-B235 #에코백스 윈봇950 #라이카Q #니콘 키미션80

그 남자는 또 ‘패배’라는 두 글자를 보고 말았다. 매번 이런 식이다. 가볍게 육두문자를 허공에 날려본다. 1년 가까이 ‘오버워치’(블리자드의 1인칭 슈팅게임)를 했는데 실력이 늘지 않아 스트레스다. 천상계(초고수 유저들이 포진해 있는 평점 구간을 이르는 말)에 가길 소망하지만 언제나 심해(하수 유저들 평점 구간)에 머물러 있다.

짜증이 차오른다. 그 남자는 믿는다. 자기는 잘하는데 매번 팀원 잘못 만나 지는 거라고. 혼잣말을 한다. “위한겐트 픽(팀원들이 위도우메이커, 한조, 겐지, 트레이서 캐릭터를 골랐다는 뜻)은 너무 심한 거 아냐?” 씩씩거리더니 갑자기 키보드를 바라보고 명상을 한다. 키보드에 일렁이는 무지개 LED 파도를 보며 마음을 정화한다. 그 남자만의 힐링 타임이다. “다음엔 꼭 이겨야지.”

 

키보드가 30만원이라고?!

그 남자는 게이밍 기어를 사랑한다. 게임할 때 사용하는 장비들 말이다. 게이밍 체어에 앉아 게이밍 노트북에 게이밍 마우스와 게이밍 키보드와 게이밍 헤드셋을 연결해 게임을 한다. 마우스패드도 게이밍 전용이다.

키보드 빼고는 대충 보기에 컬렉션이 대단해 보이진 않는다. 대신 마음만은 게이밍 기어 부자다. 게임을 저렇게 못하는 걸 보면 이런 의심도 든다. 게임이 아니라 게이밍 기어와 사랑에 빠진 건 아닌지. 물어봤다니 부인하진 못하겠다고 하더라.

분명 키보드는 대단해 보인다. 사실 그 남자, 키보드부심(키보드에 대한 자부심)이 엄청나다. 뭔 키보드냐고 물어보니 갑자기 신난 표정이다. “천상계 기계식 키보드! 다른 키보드는 따라올 수 없는 초격차 키보드죠. 키보드계 롤스로이스.” 심해 탈출은 요원해 보이지만 마음만은 천상계인 듯하다. 다행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그 키보드 이름이 뭐냐고. 커세어 K95 RGB 플래티넘 키보드다. 가격이 30만원에 육박하는 커세어의 플래그십 모델이다. 커세어는 게이밍 기어와 하이엔드 PC 부품으로 유명한 미국 브랜드다. 한국에도 팬이 많다. 그 남자는 저런 가격도 마음에 든다더라. “다른 키보드완 다르다! 난 천상계다!” 가격이 이런 메시지를 전한다 생각하는 모양이다.

▲ 사진=노연주 기자
▲ 사진=노연주 기자
▲ 출처=커세어

 

유니크 기계식 키보드

더 알고 싶어졌다. 그 남자 말고 K95에 대해. 그 남자에게 키보드 자랑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이 말을 꺼내길 기다리기라도 했나. 우수에 찬 눈빛으로 키보드와 첫만남을 회상하더니 마구 자랑해대기 시작했다.

“이 박스를 보세요. 커세어 물건은 패키지 디자인이 예뻐서 무조건 모으죠. K95는 조명이 특히 예쁜 키보드입니다. RGB 풀컬러 조명인데 싸구려 레인보우 조명이 달린 키보드랑 차원이 달라요. 우아함의 극치! 원래 커세어 제품은 영롱한 조명으로 유명합니다.”

그 남자가 키보드 위쪽을 가리켰다. “여기 보세요. ‘라이트 엣지 조명바’입니다. 이 키보드에만 있는 거예요. 테두리에 조명이 물결처럼 흐르는 모습, 이거만 보고 있으면 게임에서 아무리 져도 힐링이 된다니까요? 조명효과나 컬러는 원하는 대로 커스터마이징이 된답니다.”

아직 끝이 아니다. “프레임을 보세요. 이거 항공기에 사용되는 알루미늄 아노다이즈드 소재입니다. 괴팍한 주인 만나도 끄떡없을 거예요. 손목 받침대조차도 커세어스럽지 않나요? 받침대는 탈착이 가능합니다. 취향대로 사용하면 되죠.”

▲ 사진=노연주 기자
▲ 사진=노연주 기자

그 남자의 K95는 회축 키스위치를 장착한 모델이다. 정확히는 체리 MX RGB 스피드 스위치다. 일단 독일 체리 스위치를 장착했다는 점에서 먹고 들어간다. 다른 키스위치는 따라올 수 없는 신뢰감을 주는 이름이다. 품질 좋은 체리 스위치가 빠르고 정확한 타건을 보장한다.

사람들이 흔히들 ‘기계식 키보드’라고 하면 청축 스위치 제품을 떠올린다. 타자기 같은 경쾌한 소리를 내는 제품 말이다. 청축을 알고 나서야 적축, 갈축, 흑축을 논하는 순서가 일반이다. 그런데 회축은? 좀더 유니크하게 다가온다. 그 남자에 따르면 회축은 반응속도가 유독 빠르고 타건감은 청축과 적축 사이 느낌을 준다.

 

천상계 키보드로 천상계 갈 시간

그 남자 키보드 좌측엔 의문의 회색 버튼 6개가 달려 있다. 마음껏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매크로 스위치다. 게임에 필요한 복잡한 명령을 단축키로 지정 가능하다. 일반 키와 촉감이나 곡률이 달라 헷갈릴 일도 없다. 중요한 순간에 빠르게 찾아 누를 수 있다. “남들 못 쓰는 스킬을 저만 쓰는 느낌이랄까.”

K95는 멀티미디어 버튼도 간결하다. 버튼 하나로 LED 조명효과를 바꾸는 건 물론 윈도 키를 잠그거나 음소거를 할 수 있다. 다이얼을 돌려 음량을 조절하는 것도 가능하다. ‘Fn’ 키와 다른 키를 복잡하게 조합해 눌러야 하는 불편함 따윈 없이 직관적이다.

▲ 사진=노연주 기자
▲ 사진=노연주 기자
▲ 사진=노연주 기자

키보드 자체에 8MB 온보드 메모리가 달렸다는 점도 장점이다. 덕분에 사용자 설정을 키보드가 기억한다. 애써 조명과 매크로 키를 커스터마이징했는데 다른 컴퓨터로 키보드를 가져가니 설정이 초기화되는 일을 겪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다. 아, 어쩌다 보니 내가 그 남자 키보드 자랑을 하고 있네.

그사이 그 남잔 게임 한판을 하다가 또 졌다. K95의 라이트 엣지 조명바를 다시 응시한다. 이런 일상이 반복되겠구나 싶었다. 좋은 게이밍 기어를 쓰면 게임을 잘할 수 있다는 말은 적어도 이 남자 앞에선 통하지 않는다. 그 남자 역시 게이밍 기어가 실력이랑 관계 없다고 믿더라. 그래야 마음이 편하겠지.

내 생각은 다르다. 주인만 잘 만난다면 게이밍 기어는 얼마든 진가를 발휘할 수 있다. 일단 무한 동시 입력이 가능해서 여러 키 한번에 눌렀다고 인식 못하는 법이 없다. 매크로 키를 능수능란하게 활용해 전략 플레이를 한다면 승리에 더 다가갈 수 있을 거다. 패키지에 포함된 질감 있는 게임용 키캡을 써서 미스 컨트롤을 방지할 수도 있고.

무엇보다도 K95 같은 천상계 키보드를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게임에 임하는 기세가 대단하지 않을까. 사기가 하늘을 찔러 승리로 이어지겠지. 그 남자 빼고. 저 키보드는 내 키보드였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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