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유적 공간, 112×162㎝, 2013

 

“현재에 있으라. 바로 이 순간 천국의 문이 열린다. 두드릴 필요조차 없다. 그대는 천국의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안에 있기 때문이다. 다만 깨어 있으라. 욕망이 사라진 눈으로 주위를 보라. 그러면 그대는 웃음을 터뜨릴 것이다. 자신이 여태껏 행해온 모든 일들에 대해, 그 우스꽝스러움에 대해 웃음이 터져 나올 것이다.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밤새 꿈을 꾼 것과 같다.”<삶의 길 흰구름의 길, 오쇼 著, 류시화 옮김, 청아출판사 刊>

그때 나는 마치 사춘기로 돌아간 듯 했었어. 가슴에 구멍이 커다랗게 바람이 숭숭 무책임하게 통과하며 한마디 위로도 받지 못했었지. 그러나 그러한 원망보다 ‘왜 이런 마음이지?’하는 것에 의문이 들었던 거야. 그날도 별다른 해답을 찾지 못한 채, 강 숲에 앉아 깔깔한 기억만 더듬으며 새벽을 껴안았지. 바지는 물기에 젖어 축축하고 여명이 떠오를 즈음 비로써 내가 추위에 웅크리고 있다는 걸 느낄 정도였으니까.

부지런한 새 몇이 빠르게 강을 건너는 것을 목격했을 뿐 잔잔한 강물을 무심히 바라보다 희미한 한 줄기 빛을 타고 무언가 아른 거리는 것을 보았어. 누구도 앉기를 거부한 듯 흰 천이 씌워 진 의자하나가 마치 나를 향해 조금 조금씩 천천히 커튼이 걷히듯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지. 순간 내 귀에 책각 책각 시계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와 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 그때, 떠오르는 아침햇살 아래 드러나는 마른 잎 하나가 강물처럼 유유히 그 산을 넘는 것이 보였었어.

 

▲ 이석주(ARTIST LEE SUK JU, 李石柱)작가=서정적 풍경, 545.4×227.3㎝ oil on canvas, 1993

 

◇밤꽃향기 물안개처럼

가도 가도 끝없이 이어지는 봉우리. 앞산에 볕이 들면 저 산엔 그늘이 졌다. 산이 깊으면 산 그림자도 길어지는 법. 푸르고 검은 파도처럼 잠자듯 드러누운 산과 산 사이 길은 낮은 곳에서부터 실타래처럼 산의 역사를 풀어낸다. 바람이 되고 계곡을 흐르는 물줄기가 되어 설움과 미련을 씻어낸다.

그 산 모퉁이 줄지어 선 누런 밤꽃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이승과 저승, 만남과 헤어짐, 슬픔과 위로의 인사로 꺼이꺼이 흔들렸다. 그럴 때마다 코를 찌르고 가슴을 헤집고 눈물로 범벅되는 지독한 밤꽃향기가 물안개처럼 허공에 번졌다. 작고 보잘 것 없는 길들이 마침내 거대한 맥(脈)으로 솟을 때까지 성하의 검은 산봉우리에서 고독의 한 잎이 나풀거리며 고개를 넘는 첩첩의 산 강줄기는 들녘을 품고 흐를 것이다.

 

◇오 바다여!

아르투로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 1867-1957)가 지휘한 슈베르트 교향곡 제9번 ‘그레이트’(Schubert: Symphony No.9 D.944 ‘The Great’)가 부드러우면서 힘 있게 자상하지만 엄격한 자애의 마음처럼 흐른다. 이해와 관용을 껴안고 믿음으로 동행하는 선율은 새벽 광야를 달리는 백마의 맥박처럼 리듬은 용기 있고 생기로 넘쳐난다. 뜨거운 입김을 토하며 봉우리를 넘어선다.

그러자 아 바다…. 편견의 저 포말로 백발로 부서지는 순수여. 여전히 끓어오르는 정열로 나에게 뭍으로 밀려오는 물살을 만진다. 차갑다. 옅은 신음을 내며 모래알로 스며드는 물기의 수줍음. 내 가슴 훑고 지나간 자리에 피어나는 심산의 계곡에서 마주한 그 한 송이, 꽃.

 

키워드

#권동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