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호성 작가 作=(왼쪽)Exterior, 60.6×60.6㎝ Oil on canvas, 2016 (오른쪽)130.3×162.2㎝, 2016

 

“마음은 바람보다 쉽게 흐른다. 너의 가지 끝을 어루만지다가 어느새 나는 네 심장 속으로 들어가 영원히 죽지 않는 태풍의 눈이 되고 싶다.”<최승자 詩, 너에게, 문학과 지성사 刊>

한낮 열기는 초저녁 시간이 오면서 신기하게도 부드러운 바람으로 바뀌었다. 팽팽한 긴장을 불러오던 뜨거움이 아이스크림처럼 시원하고 부드럽게 살갗을 스치자 꽃이 피어나듯 마음이 열렸다. 여름날 해변이란 어디든 복잡하고 부옇게 부서지는 포말처럼 조금은 들떠있었다. 시끌벅적하지만 어둠이 밀물처럼 밀려드는 낮과 밤사이 그런 시간대엔 뭔가 극적요소가 다분했다.

해안절벽 나뭇가지위엔 오렌지 빛 노을이 미묘한 여운으로 가지런히 걸려 분주한 가운데 고즈넉한 시간의 흐름을 일깨우고 있었다. 우아한 인테리어의 레스토랑 파라솔에 흑장미가 그려진 까만 모자를 쓴 아이보리컬러 정장차림 노신사가 보였다. 빠르게 녹아들어가는, 얼음만 남아있는 주스 컵을 북북 소리 나게 빨아들이고 있는 그도 어떤 기대감이 초조감으로 바뀌고 있는 듯 짐작되었다.

 

▲ 116.8×80.3㎝, 2015

 

나는 노신사의 몇 테이블 건너서 아무생각 없이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다. 카페 옆 나이트클럽에선 현란한 네온사인이 켜지고 건물 벽과 심지어 백사장으로까지 흘러들어 밤의 열기를 북돋우고 있었다. 1980년대 초 문을 연 전통을 앞세우듯 출입문부터 온통 비틀즈(The Beatles)의 연주이미지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고 그곳을 추억하려는 수많은 사람들의 낙서며 삽화들이 벽면에 겹겹 가득했다.

그 숍은 언제나 비틀즈음악을 오프닝 음악으로 트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날도 실내·외의 여러 고성능 앰프가 뿜어내는 절실한 뭔가 애수가 가득 담긴 그렇게 느껴지는 ‘썸씽(Something)’이 수차례 반복하여 흘러나왔다.

“Something in the way she moves/Attracts me like no other lover/Something in the way she woos me/I don't want to leave her now/You know I believe and how…”

좁은 해안도로엔 신호등이 있었다. 어깨까지 파인 늘씬한 미모의 금발염색 아가씨가 가로등 앞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 옆엔 짧은 검은 곱슬머리의 헤진 청바지를 입은 다부진 청년이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신호를 바라보고 있는 듯, 앞만 보고서. 그러나 신호가 몇 번이나 바뀌어도 그들은 길을 건너지 않고 대화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 (왼쪽)90.9×90.9㎝, 2015 (오른쪽)50.0×65.1㎝, 2016

 

그들을 관찰하려 한 것이 아니라 거듭 말하지만 단지 내가 바라보는 바다와 묘하게 겹치고 짧은 순간이나마 두 사람만 남은 건널목풍경이 수차례 목격되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한 낮의 뜨겁던 빛은 화려한 조명에 자리를 내주었다. 해변의 밤은 조명의 열기로 부터 시작하여 청춘이 뿜어내는 뜨거운 입김으로 벌써 후끈 달아올랐다.

가로수는 해안선에 싱싱하게 자라 짙푸른 잎들을 펄럭였다. 그때였다. 청춘남녀가 신호등을 건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내가 있는 옆집 자그마한 과일주스 가게에 앉아있는 또래의 여자 앞에 앉았다. 그녀는 달콤한 미감과 빨갛게 농익은 새빨간 빛깔의 속살을 드러낼 듯 얼은 딸기가 들어있는 유리컵을 매만지고 있었다.

얼음이 녹으면서 그 속에 맺힌 물방울은 형형색색 조명에 순간순간 컬러가 바뀌면서 찐득할 것 같은 녹아내리는 느낌이 묘하게 전해왔다. 투명 컵은 가혹했다. 예쁜 과일과 꽃을, 그 아름다운 빛깔과 모양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사정없이 일그러트리고 왜곡시키고 있었다. 불현 듯 저물어가는 해안의 빨간 신호등이 잘 익은 딸기처럼 유난히 붉게 보였다.

△글=권동철/경제월간 인사이트코리아(INSIGHT KOREA) 2017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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