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이코노믹리뷰 노연주 기자 

하루 종일 쨍쨍 내리쬐는 햇볕이 조금 이른 여름을 실감하게 해주는 6월의 어느 금요일이었다. 영화 <박열>의 개봉을 앞두고 계속된 홍보 활동과 인터뷰에 조금은 지친 기색이 느껴지는 이준익 감독을 만났다. 주중 5일 동안 잡혀있던 인터뷰 일정 중 마지막 날, 거기에 이미 수십 명의 기자들과 인터뷰를 마치고 마주한  마지막 인터뷰였으니 그가 지쳐 보였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1000만 감독’의 노련함은 달랐다. 사진기자의 렌즈를 마주하는 순간 지친 기색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고 넉살좋은 표정과 여유로운 포즈를 취하는 그에게서는 묘한 포스마저 느껴졌다. 

인터뷰에서 나오는 어떤 이야기를 기사로 쓰면 좋을지 고민하는 필자에게 이준익 감독이 “<박열> 이야기는 이미 다른 곳에서 많이 했으니 다른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자”고 제안하는 바람에 인터뷰에서 영화 <박열>와 관련된 이야기는 정말이지 ‘1도’ 없었다. 대신 우리나라 영화 그리고 콘텐츠 산업에 대해 이야기가 불이 붙으면서 정해진 인터뷰 시간을 넘긴 감독과 필자는 ‘폭풍수다’를 떨었다. (심지어 인터뷰는 서로의 동의하에 반말로 진행됐다. 물론, 이준익 감독만.)  

우리나라 영화업계와 콘텐츠 산업계의 발전적 방향을 위해 하고 싶은 일, 하고 싶은 말들이 ‘너무’ 많다는 이준익 감독을 만나 그가 가지고 있던 여러 가지 생각들에 잠시 귀를 기울여 봤다. 

확실히 우리 영화의 경쟁력도 이전과 달라진 것 같아요. 

그렇지. 세계 어느 나라 영화계를 찾아가 봐도 헐리웃 블록버스터에 대해 자국영화의 평균 관객점유율 50%를 넘는 곳은 많지 않아. 이건 단순히 애국심이라던가 어떤 국수주의적 관점이라기보다는 우리나라 영화도 예전보다 훨씬 재미있어 진거야. 요즘 관객들이 어떤 관객들인데 우리나라 영화라고 ‘봐 주는 게’ 어딨어. 재미가 있으니까 영화관에 찾아가서 돈 내고 우리나라 영화를 찾아보는 거야. 또 해외의 유명 영화제에 우리 영화배우들이 초청되고, 더러는 큰 상을 받아올 만큼 배우들의 연기력도 세계가 인정할 수준에 이른 거고. 이걸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영화인 입장에서 보면 정말 대단한 일이라고! 

▲사진= 이코노믹리뷰 노연주 기자 

이러한 성장의 원동력은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이유는 간단해. 많은 투자가 이뤄 진거야. 더 재미있는 영화를 관객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혹은 더 편안한 환경에서 관객들이 영화를 관람했으면 하는 영화계 선배들의 바람들이 모인거지. 그 근거는 일본 영화계와의 차이를 사례를 보면 잘 알 수 있어. 일본은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우리를 앞서고 있지만, 몇 안 되는 예외가 있는데 그게 바로 영화야. 쉽게 말해, 일본 사람들은 자기네들이 만든 영화 우리나라만큼 잘 안 봐. 헐리웃 블록버스터를 보거나. 아니면 인기 애니메이션의 극장판을 관람하지. 어떤 통계에 보면 일본에서 제작된 실사영화의 자국 내 점유율은 30%대이거나 그 이하 정도로 알려져 있다고.

‘버블 경제’ 시대라고 불리며 눈부신 경제성장으로 많은 돈을 번 90년대 일본에서는 ‘좀 벌었다’ 하는 사람들이 영화관에도 많은 투자를 했는데 그 목적은 다분히 ‘부동산 투기’에 있었어. 영화 발전을 위한 인프라 투자가 목적이 아니었다는 말이지. 그러다보니 일본사람들도 자국 영화를 잘 안 보게 되고 그러나보니 영화의 내용도 부실해지고, 뭐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는 거지. 그래서 일본 사람들이 생각해 낸 나름의 아이디어가 인기 애니메이션을 실사영화화 하는 것인데. 그건 차라리 안 하는 것만 못한 선택이었다고 봐. 명작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이 실사 영화로 어떻게 망가지는지 봤지? 그런데 우리나라는 달랐어. 볼만한 영화들을 만들기 위해 제작비를 더 투자했고 더 많은 이들이 영화관을 찾을 수 있도록 인프라에 투자했어. 그 대표적인 결과물이 세계수준에 오른 우리의 멀티플렉스(Multiplex, 복합상영관)지.

▲사진= 이코노믹리뷰 노연주 기자 

그렇다면, 지난 몇 년 동안 문제가 되고 있는 ‘스크린 독과점’은 어떤 맥락일까요? 혹자는 멀티플렉스들의 ‘횡포’라고 강도 높게 비난하기도 하는데요. 

영화를 제작하는 이들의 입장과 멀티플렉스 사업자들의 입장이 다른 것에서 비롯한 문제라고 보면 되는데, 경계해야 할 것은 어느 한 쪽이 무조건 잘못했다고 몰아가는 일반화야. 멀티플렉스들이 헐리웃 블록버스터 영화들에게 정말 누가 봐도 차이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스크린을 몰아주는 것은 분명히 큰 문제지. 그렇다고 해서 멀티플렉스들이 지금까지 우리 영화계의 볼륨이 지금처럼 커지도록 수많은 돈을 투자하고,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 온 것까지 부정해버리고 “대기업들은 전부 다 죽일 놈들”이라는 이상한 논리가 확산되는 건 영화 제작자인 나조차도 반대야. 멀티플렉스 업체들 쪽에서는 “관객들이 찾지 않는 영화를 스크린에 걸어서 막대한 손해가 발생하면 그건 제작자가 책임져주느냐”라고 반박할 수 있어. 내 생각에는 멀티플렉스들이 영화라는 콘텐츠 공유에 있어 마치 하나의 권력기관화 된 게 문제인 것 같아. 이런 건 계속 의견을 개진하고 제작자와 유통업자들의 입장 차이를 줄여나가는 게 지금으로써는 최선인 것 같아. 서로 죽일 놈이라고 덤비면 결국 다 죽는거야. 

우리나라 영화업계가 헐리웃처럼 잘 만든 콘텐츠 하나로 많은 아들이 돈을 벌 수 있도록 성장하려면 어떤 점이 변해야 할까요. 어떤 조사에 보면 <스타워즈>가 지난 40년간 벌어들인 33조원의 수익 중 영화 상영 수익은 15%에 불과하다고 하는데요. 

우리나라 영화도 제작비로 뭐 한 2000억~3000억 아니면 그 이상으로 쓰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 

아, 그렇군요. 결국 돈이 문제였...

농담이야. 이 사람아. (웃음) 그래. 마블 영화 좋아하지? <어벤져스>나 뭐 그거랑 연결된 시리즈들 말야. 냉정하게 말해서 자국 영화의 콘텐츠를 활용해서 상영수익의 몇 배를 웃도는 수익을 전 세계에서 끌어 모으는 나라는 아마 미국이 유일할거야. 그들이 가진 천문학적 자본은 제작비의 기본 단위에서부터 범접불가한 ‘언터쳐블’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나는 우리나라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봐. 다만 그에 앞서 개선돼야 할 부분이 몇 가지가 있지. 

그게 뭔데요? 

창작자들에게 대접을 해 주는 거야. 지금까지 우리나라 영화업계의 투자는 영화의 제작 기술이나 인프라 구축에 치중돼왔어. 물론 산업으로 불륨을 키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봐. 특히 영화 제작 같은 경우는 미국이나 일본의 후반작업 대행을 하면서 우리나라의 수준도 올라갔어. 그 과정에서 벤치마킹도 많이 했지. 그래서 이제는 기술적 영역에 대한 투자는 더 이상 늘리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여전히 영화계에서 새로운 인재를 육성하는 포커스는 거기에 맞춰져 있단 말이지.

그래서 우리나라 영화계의 창작자들에 대한 대접은 아직도 후진국과 크게 다르지 않아. 생각해 봐. 돈을 먹고 살 정도는 받아야 재밌는 이야기도 막 쓰고싶고 그렇지 않겠어? 앞으로 영화에서 갈수록 중요해지는 건 아이디어고, 스토리텔링이고 매력적인 캐릭터야. 이걸 만들어내지 못하면 지금은 헐리웃 영화에 맞서 어찌어찌 버티는 우리나라 영화일지라도 장담할 수 없는 거야. 그러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영화 스토리를 만드는 창작자들에 대한 처우개선 그리고 인재 육성에 조금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봐. 그래야 우리나라 영화, 나아가서는 콘텐츠 업계가 지금보다 더 발전할거고.   
          
최근 넷플릭스의 영화 <옥자>에 대한 멀티플렉스들의 상영 보이콧 사건도 있었는데요. 이건 어떻게 보시나요? 

콘텐츠 공유의 확장 문제인 것 같은데. 글쎄, 콘텐츠를 공유하는 방법도 결국 계속 새로운 유형이 생겨나는 거고. 소비자들이 선호하는 방법이라면 온라인 기반이든 오프라인 우선이든 의미가 없어지지 않을까? 지금은 그 과도기라고 봐. 

영화 이외에 우리나라 콘텐츠 산업에서 이 영역이 좀 더 발전했으면 하시는 부분이 있으시다면요
  
응. 있어. 애니메이션. 우리나라 영화계에서는 아직도 애니메이션의 가치를 약간 무시하는 경향이 있어. 물론 척박한 우리나라 업계의 상황 가운데서도 부단히 애쓰시는 분들이 많아서 그게 너무 안타까워. 그런데 생각해 봐.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이 우리나라에서 1000만 관객을 넘었지? 외국 애니메이션은 영화와 수익 배분이 조금 달라서, 국내 배급 대행사가 그렇게 많은 수익을 가져가지는 못해. 거기다 요즘 메이저 스튜디오들은 각 나라에 직접 배급사를 두고 운영해 그 비용도 줄이고 있어. 그러면 애니메이션 영화 상영수익의 한 50%는 미국의 제작사로 가는 거라고 보면 돼. 어마어마하지? 거기다 우리나라에서 그 애니메이션 관련 캐릭터 상품이 팔리면 판권 사용료 수익도 제작사로 가지. 

▲사진= 이코노믹리뷰 노연주 기자 

앞에서 영화를 가지고서는 일본을 좀 ‘디스’했지만 애니메이션으로는 미국의 메이져 영화 스튜디오도 상대가 안 될 정도로 콘텐츠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게 바로 일본이야. <원피스>, <드래곤볼> 등 애니메이션부터 시작해서 <헬로키티>까지. 어느 정도 감이 오지? 애니메이션은 앞으로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는 콘텐츠야 어떤 면에서는 영화 이상이지. 우리나라의 애니메이션 업계의 문제점을 이야기하자고 하면 대학교 1년 강의를 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암튼 그래. 관심이 필요하다구. 근데 인터뷰 시간 넘어가지 않않나? 우리? 

네. 

암튼 주저리주저리 말이 길었네. 재밌었다구. 기사 좀 잘 써주시오. 기자양반. 
 
끝으로 한 마디 하신다면요.

근데 재미있는 거 하나 알려줄까? 제작비 100억이 들어간 영화가 있고, 1000억이 들어간 영화가 있어. 근데 왜 우리나라에서는 둘 다 똑같이 1만원에 볼 수 있을까? 이거 좀 재미있지 않아?  

감독님, 영화 <박열> 파이팅입니다! 

그래 그래. 우리 영화도 좀 잘 돼야지. 아유, 다음 스케줄 늦겠다. 다음에 또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