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를 참으면 병이 된다'는 말은 사실이다. 화를 제때 풀지 않고 쌓아두면 한국인만의 특징적인 증후군인 '화병'에 걸릴 확률이 높아진다.사진=이미지투데이

“답답하고 울화통이 치밀어 죽겠어, 아주.”

한국 가족 드라마에서 시댁·남편·자식·경제적 문제 등으로 어머니가 가슴을 주먹으로 두드리며 하는 전형적인 대사다.

가슴이 턱턱 막히고 머리와 얼굴에 열이 오른다. 잊어보려 침대에 누웠지만 화가 나고 억울해 도저히 잠이 오지 않는다. 그런데 어디다 화를 낼 수도 없다. 그렇게 시간이 쌓이다보니 어느새 이런 증상이 만성이 됐다.

우리는 이를 일명 ‘화병(火病)’에 걸렸다고 표현하는데, 화병이라는 단어는 ‘울화병(鬱火病)’의 준말이다.

화나는데 낼 수 없는 상황, 화병 만들어…‘50대’ 환자 최다

화병은 ‘화’에 관한 병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화를 제대로 내지 못해 생기는 병이다.

화가 지속적으로 풀리지 않고 쌓여 신체적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하기 때문에 언제 생길지 알 수 없지만 대략적으로 화가 축적되기 시작한 이후 8~9년째부터 증상을 느낄 수 있다.

때문에 화병을 앓는 사람들은 화가 축적될만한 시간을 경험한 40~50대가 가장 많다. 대한한방신경정신과학회가 2009년부터 2012년까지 화병임상진료지침을 개발하기 위해 실시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화병으로 모집된 환자 151명중 50대가 68명으로 45%를 차지했다. 이어 40대 38명, 30대 19명, 60대 18명, 20대 8명 순이었다.

▲ 화병 환자의 대부분은 여성으로, 특히 중년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다. 중년여성의 화병 요인은 시댁·남편·자식 문제처럼 가정 내부에 주요인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사진=이미지투데이

‘남편·시댁’에 속 끓는 중년여성…남성의 경우 ‘사업실패’가 주요인

대한한방신경정신과학회가 실시한 위의 연구결과는 한국인 ‘화병’만의 독특한 인구학적 특성을 보여준다.

총 151명의 화병 환자중 여성이 138명(91.4%)으로 대다수를 차지하고, 그들이 꼽은 가장 큰 스트레스 원인이 남편이었던 것. 이어 재정문제와 시댁문제로 고통을 호소하는 여성도 많았다.

실제로 병원을 찾는 화병 환자들의 대다수가 50대 중년여성이다.

경희대학교한방병원 한방신경정신과 조성훈 교수는 “화병으로 병원을 찾는 환자들 중 중년여성이 제일 많다”며 “통계를 정확하게 내보지는 않았지만 대략적으로 여성이 60~70%로 대부분을 차지하고 20~30%가 남성 환자”라고 설명했다.

화병으로 조성훈 교수를 찾은 중년여성들이 호소하는 문제도 대한한방신경정신과학회의 조사결과와 다르지 않다. 조성훈 교수는 “환자들은 대체로 남편 문제와 시댁 문제로 병원을 찾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조성훈 교수에 따르면 남성 화병환자의 경우 여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중년이 많지만, 토로하는 고민은 주로 사업실패·직장문제 등 경제적 어려움과 관련돼 있었다.

화병, 중년여성 많은 이유? “일단 참아” 유교문화 ‘한몫’

전문가들은 화병환자 중 중년여성이 많은 이유로 비합리적인 일이 일어나도 참고 보는 ‘유교문화’를 꼽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옛말 중에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 장님 3년, 총 아홉 해를 참고 살라’는 말이 있다. 비합리적인 상황에서도 주변 환경은 여성에게 무조건 순종하길 요구했다. 당시 여성들은 유교문화 탓에 화를 제대로 풀지 못했고 그 결과 화병을 앓게 됐다.

최근에는 시집살이보다 남편·자식·재산문제가 중년여성들을 괴롭히고 있다.

조성훈 교수는 “과거에 비해 요즘은 시집살이로 인한 화병으로 병원을 찾는 분은 줄었고 남편,·자식·재산 문제로 오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젊은 여성들도 오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에도 남편의 외도 문제가 화병 요인의 주를 이룬다”고 덧붙였다.

▲ 화병 환자의 대략 20~30% 정도를 차지하는 중년남성이 화병으로 병원을 찾는 주 요인으로는 사업실패나 직장내 문제가 대부분을 차지한다.사진=이미지투데이

무조건 참는 것 해답 아냐…건강하게 '화' 다스리는 법은.

우리가 처해진 환경은 슬픔·분노·억울함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풀리지 않은 채 계속 쌓여 가는데도 이런 상황을 당연시 하고 오히려 참으라 하는 경우가 많다.

‘너만 힘든 게 아니지 않느냐, 모두가 이렇다’든지 ‘그런 상황에서 반박을 해봐야 너만 이상한 사람이 될 것이다’는 말에 비합리적인 상황을 무작정 참는 것은 화병을 악화시킬 수 있다.

그렇다면 화가 날 때마다 그때그때 즉각적으로 화를 내는 것은 도움이 될까.

조성훈 교수는 “무조건 화를 쌓아두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지만 그렇다고 화가 났다고 바로 상대에게 화를 내는 것은 관계를 악화시켜 또 다른 화를 불러올 수 있어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추천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마음 속으로 화가 쌓여있는데 왜 화가 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며 "화병을 고치기 위한 첫걸음은 자신의 화를 인지하고 화의 원인 중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을 정확하게 인지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하루 30분 햇빛 쬐며 산책, 소리 지르며 심리적 위축 완화

화병을 관리하기 위한 한방적 치료는 한약치료, 뜸치료, 기공치료 등이 있다. 만약 병원을 찾을 수 없다면 매일 30분씩 해를 쬐며 산책하거나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소리를 지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조성훈 교수는 “바쁜 직장인의 경우 하루 30분이라도 시간을 내서 해를 쬐며 산책하는 것이 도움이 되고, 병원을 찾는 환자들에게 실제로 권하는 치료법 중 ‘소리지르기’ 요법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이어 “요즘에야 산에서 소리를 지르는 것이 동물에 피해가 간다고 금지돼 있지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는 괜찮다고 본다”며 “요즘엔 사회에서 워낙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많아 지나치게 눈치 보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데 이 같은 요법을 통해 심리적인 위축을 완화시킬 수 있어 권고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화병으로 고생하시는 분들은 일단 본인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이 먼저”라며 “`내가 이렇게 힘들게 살아왔구나`, `내가 참 대단하다`고 자신을 위로하는 것이 화병을 치료하는 데 있어 굉장히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조성훈 교수는 마지막으로 “고통 속에 너무 오래 있어서 자신 스스로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을 이성적으로 먼저 인식하고 자신을 위로하면서 필요하다면 피해를 준 상대에게 ‘정당하고 건강한 방식’으로 화를 표현하라”고 조언했다.  

▲ 화병 자가 검진 리스트.자료=경희대학교한방병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