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연구진이 활성단백질(효소)인 단백질 키나아제엠(PKM)을 이용해 바다달팽이의 기억을 선택적으로 지우는 데 성공했다.사진=이미지투데이

트라우마로 남은 기억을 지울 수 있는 가능성이 동물실험을 통해 확인됐다.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연구진이 지난 22일(현지시간) 국제 저명 생명과학학술지 셀(Cell)의 자매지인 최신 생물학(Current Biology)지에 연구결과를 게재했다. 

연구팀은 일명 ‘바다 달팽이’로 불리는 군소(Aplysia)를 이용해 신경세포(Neuron)에 저장된 기억을 선택적으로 지울 수 있는지를 실험했다. 군소는 신경세포가 크고 신경망이 단순해 신경 연구에 많이 쓰이는 연체동물이다.

연구팀은 군소가 가진 신경세포 중 하나의 운동신경세포(Motor Neuron)에 연결된 두 개의 감각신경세포(Sensory Neuron)를 자극했다. 감각신경세포가 자극되면 연관 기억과 비연관 기억이 유도된다. 연관 기억은 사건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는 기억이고 비연관 기억은 그 반대이다.

예를 들어 A라는 사람이 범죄율이 높은 지역의 어두운 골목을 걷고 있었다. 지름길로 가려고 하는 도중 근처에서 강도가 나타났고 강도의 옆에는 사서함이 있었다고 치자. 이 경우 ‘범죄율이 높은 어두운 골목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정보는 미래의 상황 판단에 정보를 줄 수 있는 연관 기억이다. 반면 ‘사서함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정보는 A가 겪은 트라우마적인 사건과 별 관련이 없는 부수적인 비연관 기억이다.

그러나 이 두 기억이 엉켜있을 때, A는 사서함만 봐도 과거의 트라우마가 떠올라 괴로움을 겪게 된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는' 격이다.

연구팀의 목표는 의사결정에 도움이 되지 않는 비연관 기억을 제거하는 것이다.

사무엘 샤셰르 박사는 “우리의 목표는 의사결정에 필요한 연관 기억은 없애지 않으면서 비연관 기억은 제거하는 전략을 개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연구팀은 감각신경세포가 자극돼 연관 기억과 비연관 기억이 동시에 유도됐을 때 두 가지 기억의 연결 강도가 각기 다른 단백질키나아제엠(PKM)으로 불리는 효소에 의해 유지된다는 것을 발견하고 PKM의 활성을 막는 분자를 군소에 투입했다. 

그 결과 PKM 분자 중 하나를 차단하면 한 가지 기억을 다른 기억에 영향을 주지 않고 지울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팀은 척추동물인 인간의 PKM이 연체동물인 군소의 PKM과 유사하기 때문에 이 연구결과가 인간의 기억을 이해하는 데 유용할 것이라고 전했다.

▲ 컬럼비아 대학 연구진이 동물실험에서 입증한 것처럼 선택적으로 기억을 지울 수 있다면, 이 같은 결과를 활용해 외상 후 스트레스성 장애(PTSD)의 치료법으로 개발할 수 있다.사진=이미지투데이

특히 연구팀은 이 같은 연구결과가 마땅한 치료법이 없는 외상 후 스트레스성 장애(PTSD)의 치료법으로 개발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PTSD는 끔찍한 사고를 당한 후 정신적인 충격이 지속되는 병이다.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의 심각한 사건을 겪었을 때 느꼈던 충격과 공포가 사건이 끝나서 한참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생각나고, 그 때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비슷한 경험만 해도 죽을 것 같은 공포감을 느낄 수 있다. 치료법으로 심리치료와 SSRI(선택적 세로토닌 흡수 억제제)가 사용된다. SSRI는 우울증과 불안을 해소하는 데 주로 쓰이는 약물이다.

휴 장위안 박사는 “적절하지 않은 반응을 유발하는 비연관 기억을 제거하면 PTSD와 같은 불안장애를 완화시킬 수 있다”고 설명했다.

사셰르 박사는 “우리의 연구는 불안을 해결할 수 있는 치료법으로 개발될 수 있다”며 “예를 들어 기억이 뇌에 저장될 때 비연관 기억의 유지를 방해하는 약물을 투여해 비연관 기억을 다시 기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