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충무공전서의 기록을 보면, 이순신장군이 말로 잘 타이른 군인의 심법이란 일본으로 말하면 무사도의 정신이오. 중국으로 말하면 탕, 무의 군정입니다. 어진 군자의 한 번 미리 헤아림이란 천만인을 살게 할 수 있으니 우리 군민에게 끼친 그 은덕이 과연 어떠한가 보라! 이 백암공은 어진 군자의 마음을 가졌으며, 영웅호걸의 자질을 지녔으며, 충신의사의 절개를 갖췄으니, 동양에 있어서 누구와 비교할까? 제갈공명과 남목정성(楠木正成=구스노키 마사시게=일본 가마꾸라 시대 말기의 무장. 천황에 대한 충성심의 상징적 인물)과 같은 무리의 인물입니다.”

“맞는 말이지만 필자 생각으로 이순신장군에 비하면 저 두 사람은 세발의 피라고 본다. 안골포 연안에 적의 시체들을 살아남았던 적병들이 열두 무더기에 모아 화장하였는데, 아직도 불이 남아서 살과 뼈가 타는 냄새가 하늘로 올라가고 팔과 다리, 머리 같은 것이 낭자하게 널려 있고, 안골포 성 안팎에는 피가 흐르고 길바닥에도 여기 저기 붉게 물이 들었다. 적군이 얼마나 죽었던지 헤아릴 수 없으나 열두 무더기에 탄 재와 타다 남은 수족을 보면 3천 명은 넘을 것 같다.”

“네, 당시에 삼천 명을 몰살시킨 것은 대단한 전과로서 일본군의 수괴 히데요시는 나중에 그 죄를 다 받게 됩니다. 장군은 함대를 몰고 양산군 낙동강 어구의 김해부로 나오는 포구와 감동포라는 데를 탐망하였으나 적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것은 모두 다 미리 겁을 내어 도주한 것으로 보고, 장군은 동래 땅 몰운대 앞바다에 배를 벌려 진을 쳐 군대의 위세를 엄하게 보이고, 사방에 탐망선을 보내 적의 남은 흔적을 탐망케 하였는데, 가덕도 응봉, 김해부 금단곶연대에도 척후병을 보내 적정을 염탐하게 하였습니다.”

“음! 장군의 조심성에 항상 감탄을 하는데, 이번에도 철저하게 염탐을 시킨 결과 이날 戌時(壬戌)에 금당곶연대에 망보던 척후병 경상우수영 수군 허수광이 돌아와 고하되

‘금단곶연대에 망을 보러 올라가는 길에 봉우리 아래 암자에 있는 노승을 데리고 망대에 올라가 연기를 피우면서 알아본즉 낙동강 깊은 목에 여기저기 정박한 적선이 백여 척이나 되는데, 노승의 말에 의하면 적선이 매일 50여 척이나 몰려나오기를 11일 동안 하였고, 어제 안골포에서 접전하는 포성을 듣고 간밤에 거의 다 도망하여 부산방향으로 달아나 백여 척만 남은 것이라고 합니다.’

라고 고하였다.”

“네, 이 말을 들은 장군의 부하제장들은 강 깊은 목에 정박한 적선을 소탕하기를 주장하였으나 장군은 강 깊은 속에 숨은 적선을 토벌하기는 불가능하다고 하여 천성보로 물러 나왔다가 그 밤으로 회군하여 1592년 8월 18일, 칠월 열이틀, 己巳일 사이에 한산도로 돌아왔습니다.”

“음! 한산도에는 전번 초 8일(8월 14일, 乙丑일)싸움에 배를 버리고 상륙하였던 적병들이 여러 날 굶은 끝에 몸을 가동할 수가 없어서 해변에서 조는 놈들도 있었고, 나머지 4백여 명 적병은 새장 안에 갇힌 새 모양이라 도망할 길이 없을 것이라 하여 시체 좋아하는 경상우수사 원균으로 하여금 한산도를 지켜 지친 적을 도망하지 못하게 하고 장군은 전라우수사 이억기 이하 제장과 함께 한산도를 떠나 본영 전라좌수영으로 돌아가기로 하였다.”

“네, 양산과 김해의 강 가운데와 부산의 적을 놔두고 회군하는 까닭은 전략상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한산도와 안골포 싸움에 예기를 상실한 적군이 구석진 곳에 콕 틀어 박혀 나와 싸우기를 피하므로 아군의 육군과 협력 없이 수군만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음이오, 둘째는 수많은 군사가 여러 날 싸움에 피폐할 뿐만 아니라 적의 탄환과 화살에 상한 사람도 많고, 또 군량이 다하여 전라도에 돌아가기 전에 적군이 무인지경으로 만든 경상도 연안에서 군량을 얻을 길이 없음이오, 셋째는 금산을 점령한 적세가 크게 성하여 전주를 범하였다는 정보가 왔으니 잘못하면 전라도 전부가 적의 육군의 말발굽 아래에 밟히게 된다면, 그야말로 조선군이 근거를 잃어버릴 근심이 있음이었다. 만일 전라도마저 적의 손에 들어가면 장군의 수군은 양식을 얻고 발붙일 근거를 잃어버려 조선은 영영 회복할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