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하지만 뼈 있는 쓴소리였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23일 오후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가진 4대그룹 정책간담회에서 한 인사말을 보면서 든 생각이다.

▲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간담회에는 4대 그룹을 대표해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 정진행 현대자동차 사장, 박정호 SK텔레콤 사장, 하현회 ㈜LG 사장이 참석했다. 이들은 4대 그룹 오너가 아닌 전문 경영인이지만 김 위원장은 최대한 정중한 말로 인사했다. 그는 ‘감사’ ‘죄송’ ‘양해’라는 단어를 써가면서 말했다.

김 위원장은 “기업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불철주야 애쓰시는 중에 오늘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입을 연 다음 간담회 제안과 관련해 “기업 측 입장에서는 한편으로는 무례한 돌출 행동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고 다른 한편으로 큰 부담이 될 수도 있는 자리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이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기업인들을 직접 만나서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 결례를 범했으니 널리 양해해주시기 바란다”면서 죄송하고 감사하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그는 대기업 집단을 치켜세웠다. 김 위원장은 “‘삼성, 현대자동차, SK, LG그룹 등을 비롯한 대규모기업집단들은 한국경제가 이룩한 놀라운 성공의 증거이며, 미래에도 한국경제의 소중한 자산이 될 것입니다’는 빈말이 아니다”면서 “저 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날카로움이 없는 정중한 발언은 여기까지였다. 김 위원장은 움크리고 있던 발톱을 서서히 내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제게는 한 가지 아쉬움이 있었다”면서 한국경제가 성장하고 경제 환경도 급변하면서 대기업집단을 바라보는 국민의 시선이 크게 달라졌지만 각 그룹의 경영전략과 의사결정 구조는 "사회와 시장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점이 없지 않았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소수의 상위 그룹들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는데 다수 국민의 삶은 오히려 팍팍해진 것은 뭔가 큰 문제가 있다는 의미"라면서 "모든 것이 기업의 잘못 때문이라는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기업도 되돌아보아야 할 대목이 분명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그는 이것이 자기만의 생각이 아니라 국민 모두가 그렇게 느낀다는 말도 했다.

그는 문재인 대통령이 강조한 말로 자기 속뜻을 펼쳐보였다. 김 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께서는 한국경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모든 경제주체들이 대화하고 협력하며, 배려와 양보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신 바 있다”면서 “저 역시 그렇다. 새로운 사전규제 법률을 만들어 기업의 경영판단에 부담을 주거나 행정력을 동원하여 기업을 제재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렇기 때문에 공정거래위원회의 정책 내용을 설명하고, 나아가 새 정부의 정책 방향에 대한 이해를 구함으로써, 기업인들 스스로 선제적인 변화의 노력을 기울여주시고 모범적인 사례를 만들어주십사 하고 부탁드리기 위해 오늘 이 자리를 마련했다”고 다시 설명했다.

김 위원장은 기업인들에게 정부 정책에 대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해 줄 것을 당부하면서 이에 대해 "경청하겠고, 협의할 것이며, 최선을 다해 지원하겠다"고 강조했다. 또 이날 간담회가 일회성 행사로 끝나서는 안 되고 보여주기식 이벤트로 끝나서도 안 될 것이라면서 개별 그룹과의 협의, 정부 차원의 협의도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하고 싶은 말은 뒤에 남겨뒀다. 그는 “공정거래위원장으로서 최대한의 인내심을 가지고 기업인들의 자발적인 변화를 기다리겠다”면서 “다만 한국경제를 둘러싼 환경이 결코 녹록치 않다는 점, 우리 기업이 또 다시 변화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점, 한국경제와 우리 기업에 남겨진 시간이 많지 않다는 점을 강조한다”는 말로 인사말을 끝냈다.

마지막 발언의 방점은 ‘기다린다’보다는 ‘시간이 많지 않다’에 있었다. 시간이 없으니 재벌들이 빨리 스스로 변화하라는 촉구한 것과 다름없다.  인사말이지만 4대 그룹 경영자들에게는 실로 '무서운'  말이다. 들어주고 협의할 테니 성과를 내놓으라는 말이 이행되지 않을 경우 어떤 조치가 뒤따를지 능히 짐작이 가기에 더욱 그렇게 들린다.

인사말이어서 속단하긴 이르지만 적어도 김 위원장이 한 마지막 발언으로 공은 4대 그룹으로 넘어갔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재벌개혁을 공약으로 내걸고 부당내부거래, 일감몰아주기 등에 메스를 가하고 있는 문재인 정부가 원하는 방식의 개혁 방안을 수용한 4대 그룹들이 스스로 자기 '생가죽'을 벗기는 개혁안을 내놓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