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미지의 반역. 출처 = 르네 마그리트, 1929, 캔버스에 유채,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으로 파이프가 그려져 있는 그림 아래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Ceci n'est pas une pipe)’라는 문구를 새겨져 있다. 캔버스에 그려진 것은 명확한 파이프다.

그런데 파이프가 아니라고? 캔버스 앞에 선 관람객은 작가가 왜 그런 문장을 작품에 문장을 넣었는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정말 파이프가 아닌가?’, ‘그렇다면 파이프가 아니고 도대체 뭐란 말인가?’, ‘작가가 관람객에게 거짓말을 하는가?’ 마그리트는 이처럼 친숙한 이미지 앞에선 관람객의 당황스러움을 야기한다.

 

인간은 제목을 적은 글자도 그림, 즉 이미지의 하나로 인식한다. 파이프 그림을 보고 파이프를 떠 올리기도 하고, 글자를 보고도 곧바로 파이프를 떠올린다. 파이프 그림을 통해 보여준 마그리트의 문제의식을 적용하면 언어도 인간의 사고를 속인다는 말이 된다. 이러한 현상을 ‘프레임(frame)’이라고 한다. 프레임은 창문이나 액자의 틀로서 상대가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을 내가 선호하는 것으로만 제시하여, 어떤 결과라도 내가 만족할 수 있는 결정으로 만들려는 전략적 선택이다.  

이러한 프레임은 우리 주변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신용카드’는 기능에 걸맞게 이름을 붙인다면 ‘외상카드’라고 해야 한다. 하지만 외상카드라는 부정의 프레임을 적용하면 카드를 쓸수록 빚이 쌓인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에 불필요한 소비를 자제하게 된다. 반면 신용카드라는 긍정의 프레임을 적용하는 순간, 카드를 쓸수록 신용이 쌓이는 착각을 한다.

일반적으로 신용이란 사람을 신뢰 또는 신임한다는 뜻으로 사회생활에 있어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를 원활하게 이어주는 바탕이 된다. 이러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신용카드가 보급된 이후 과소비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심지어 신용불량자수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된 점만 보더라도 프레임을 통한 언어조작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발휘되는가를 알 수 있다.

인간은 언어적 조작(프레임)을 적용하여 자신에게 유리한 의사결정을 이끈다. ‘대량해고’ 보다는 ‘정리해고’라는 언어를 사용한다. 대량해고라고 하면 실업으로 고통받는 모습을 떠올리지만 정리해고는 기업의 경영 효율화, 높은 생산성 같은 내용이 떠오른다.

나는 병원에 갈 때마다 듣기 힘든 언어가 있다. ‘환자님’, ‘환자분’ 이라는 단어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사투를 버리는 사람에게 ‘환자(患者)’는 고통과 시련의 프레임이다. 의사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한 약자의 프레임이다. 결국 환자라는 프레임에 가두어 눈과 귀를 막고 의사 말에 꼼짝없이 사람을 구속시킨다.

몇 해 전 아버지가 수술을 받았다. 그런데 그 병원의 담당 의사는 환자를 부르는 호칭이 달랐다.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어르신”, “여사님”, “정 원사님”하고 인사를 건냈다. 나는 아버지가 퇴원하는 날 그 의사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다른 병원에서는 환자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데 왜 선생님께서는 환자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으세요?” 그러자 그 의사는 “환자에서 ‘환(患)’은 아플 환이잖아요. 자꾸 환자라고 부르면 더 아파요. 빨리 나아서 건강해지셔야죠.”

인간은 언어에 의해 정신적 지배를 받는다. 그래서일까. 사회적 강자나 지배세력은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 및 확대하기 위한 수단으로 언어를 사용한다. 특히 정치인들이 활용하는 프레임 전략은 가히 폭력적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구는 왜곡과 조작의 늪에 살고 있는 일반 사람들에게 인식의 전환을 촉구하는 것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