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타임지는 2002년 3월19일 아시아 전자기업의 흥망성쇠를 분석하는 기사에서 삼성전자와 소니의 사례를 들었다. 당시 타임은 "1997년 이전까지 사람들은 소니와 미쓰비시의 TV를 구입할 형편이 되지 못하면 삼성제품을 구매했지만 이제는 삼성전자의 제품이 품질 수준은 대등하면서 가격은 저렴해 소비자들이 선호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타임지의 예상은 적중했다. 2002년 4분기 삼성전자는 총매출 9조9300억원, 영업이익 2조1000억원, 순이익 1조9000억원을 기록하면서 글로벌 전자시장의 강자로 부상했으나 소니는 같은 기간 무려 550억원의 손실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당장 국내 언론들은 1970년대까지 일본 산요전기로부터 트랜지스터와 라디오는 물론 TV 생산 기술을 '전수'받아 어설픈 장사에 나서는 한편, 일본 기술자를 접대하는 달빛관광을 불사해가면서 아득바득 정상에 오른 삼성전자를 일제히 찬양하기 시작했다.

소니는 위기감을 느꼈다. 당시 소니의 총수인 이데이 노부유키 회장은 원래 삼성전자의 가능성에 회의적이었으나 이제는 '아시아를 대표하는 전자기업'이라는 자리가 위태로워졌다는 것을 직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소니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이었다. 소니와 더불어 일본 전자왕국의 긴 겨울잠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소니 센터. 출처=플리커

일본 전자왕국의 맏형, 소니의 부활

2017년 현재, 일본 전자왕국의 긴 겨울잠이 끝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초유의 회계분식 사건과 대규모 원전사업손실로 핵심인 낸드플래시 사업 매각에 나서고 있는 도시바나 지난해 대만 폭스콘에 인수된 샤프처럼 과거의 악몽에 발목잡힌 기업도 있지만 대체적인 분위기는 '부활'로 좁혀지고 있다.

특히 소니가 의미있는 날개짓을 시작했다. 최초 시작점은 '가전의 왕자'라는 TV다.  시장 조사 회사 IHS는 지난 11일 올해 1분기 글로벌 프리미엄 TV 시장에서 1500달러 기준으로  소니가 39%의 점유율을 기록해 1위에 올랐다고 발표했다. LG전자는 35.8%, 삼성전자는 13.2%에 그쳤다.

소니는 지난해 4분기 점유율 17.5%에 그쳤으나 이번에는 2배 이상을 기록한 것이다. 소니는 2500달러 시장에서도 올해 1분기 34.4%의 점유율을 기록해 40.8%를 기록한 1위 LG전자를 바짝 추격했다.

▲ 삼성전자 QLED TV. 출처=삼성전자

물론 지난해 전체 점유율은 아직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앞섰지만 '올해 1분기'라는 최신 데이터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소니의 TV 시장 경쟁력이 빠른 속도로 올라오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2500달러 시장에서 2015년 말 당시 50% 이상의 점유율을 기록했지만  최근 완전히 주저앉는 분위기다.  LG전자는 2500달러 시장에서 아슬아슬한 우위를 보이는 가운데 1500달러 이상 시장에서는 기어이 소니에게 뒤를 잡혔다.

최근의 분위기를 전체적으로 보면 모든 TV 시장(LCD 포함)에서 삼성전자가 아직 1위를 차지하고 있으나 프리미엄 TV 시장에서는 OLED 진영을 주도하는 LG전자가 2500달러 시장에서 아슬아슬한 1위, 소니가 2위로 추격하고 있고 1500달러 시장에서는 소니가 1위에 올라 주도권을 잡는 모양새다. 시장조사 회사별로 결과가 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소니의 약진'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 LG전자 OLED TV. 출처=LG전자

품질 평가에서도 소니가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미국 컨슈머리포트는 16일 각 제조사의 프리미엄 TV 품질을 조사한 결과 소니의 LCD TV(XBR-65X930E)가 82점을 받아 1위를 기록하며 삼성전자와 LG전자를 압도했다고 밝혔다. LG전자의 슈퍼 울트라HD TV(65SJ9500)는 80점, 삼성전자의 Q9(QN65Q9F)은 79점이다. QLED TV의 삼성전자와 OLED TV 진영의 핵심인 LG전자가 품질 측면에서도 소니에 허를 찔린 셈이다.

여기에는 HDR(high dynamic range)칩으로 OLED TV의 두뇌를 완성해 X1 익스트림 프로세서까지 진격한 소니의 기술력이 큰 역할을 했다.

TV가 '가전제품의 왕자'로서 제조사의 핵심 경쟁력으로 여겨진다는 점에서 다소 충격적이다. 특히 모바일 시대를 넘어 초연결 인프라 시대가 열리는 가운데 TV는 초고화질과 대형화 패널의 바람을 타고 스마트홈의 핵심으로 부상하는 중이다.

심지어 프리미엄 TV 시장은 미래 TV 시장의 패권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이정표라는 점에서 소니의 약진은 국내 제조사에게 상당한 위협이 될 것으로 보인다.

▲ 소니 LCD TV(XBR-65X930E). 출처=소니

히라이 가즈오, 올해를 '부활의 해'로 명명하다
2000년대들어 철저하게 몰락한 소니와 일본 전자왕국은 어떻게 부활의 신호탄을 쏠 수 있었을까? 중국 기업의 가격 경쟁력과 한국 기업의 제품 경쟁력에 밀려 샌드위치 신세로 전락한 과오를 털어내고 자신의 핵심 경쟁력을 최근의 초연결 트렌드와 연결시킨 게 주효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대표 사례가 최근 TV를 중심으로 비상하기 시작한 일본 전자왕국 맏형인 소니다. 사실 소니는 '내구도'가 뛰어난 기업이다. 1980년대  만든 베타맥스가 VHS에 밀려 역사속으로 사라졌으나 기어이 차세대 콘텐츠 경쟁력으로 실책을 만회했을 정도로 소니는 위기에 강하다. 그러나 내부 조직의 붕괴가 발목을 잡았다. 중국과 한국의 공세가 시작되는 상황에서 기존 전자 사업부와 새로운 먹을거리로 낙점한 콘텐츠 사업부를 중심으로 끊임없는 충돌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여기서 소니는 조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플레이스테이션 신화의 주인공이자 소니의 기술 사무라이로 추앙받던 구타라기 겐이 아닌, 영국 출신의 노련한 협상가인 하워드 스트링거를 CEO로 낙점하는 최악의 수를 뒀다. 특유의 친화력으로 조직의 갈등을 풀어내기를 바랬으나 하워드 스트링거는 사내 정치만 키웠다는 비판을 받았다. 물론 만성 적자에 빠져 있던 TV사업부를 대부분 잘라내고 컴퓨터 사업을 접는 등 나름의 체질개선에 있어서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소프트웨어 시장에 대한 대응이 늦은 것도 문제였다. 1979년 발표된 소니 워크맨의 성공에 도취해 그 이상의 단말기 사용자 경험에 매진하지 못한 게 패착이었다. 애플 아이폰의 등장으로 세상이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로 변하고 있었으나 소니는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다.

1989년 미국 컬럼비아픽처스엔터테인먼트를 사들이는 등 무리하게 벌인 사업확장도 발목을 잡았다. 각 사업이 원만하게 굴러갔으면 문제가 없었겠지만  대부분의 사업이 '도토리 키재기' 수준의 실적을 올렸다는 게 문제였다. 여기에 중국과 한국 제조사들이 가격인하 공세를 벌이는 한편 소니 제품과 큰 차이가 없는 '퀄리티'를 보장하면서 '소니 프리미엄'이라는 개념도 사라졌다.  상대적으로 복잡한 하드웨어 사용자 경험을 강조하며 '소니만의 길'을 고집스럽게 걸은 것도 논란거리였다.

다행히 2012년 히라이 가즈오 최고경영자(CEO)가 부임하면서 소니는 반등의 기회를 잡았다. 1984년 소니뮤직엔터테인먼트재팬에 평사원으로 입사한 그는 입사 28년 만에 소니의 컨트롤 타워가 되어 모노즈쿠리(장인정신)의 복원을 바탕으로 반전을 이끌어냈다. 대표적인 결과물이 이미지 센서다. 지난해 글로벌 시장에서 무려 44.5%의 점유율을 기록한 가운데 소니의 핵심 자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는 오로지 히라이 가즈오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히라이 가즈오 CEO는 2014년 9월17일 설립 56년 만에 처음으로 배당을 중단하는 초강수를 통해 강도 높은 체질개선을 추진했다. 그리고 지난 4월 소니는 올해 매출 목표치 80조원, 영업이익 5조원을 자신하고 나섰다. 히라이 가즈오 CEO는 2017년을 '부활의 해'로 명명하고 근 20년 만에 최고 실적을 거두겠다고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소니도 갈 길이  멀다. 도시바는 물론 캐논과 니콘은 여전히 반등의 기회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 그러나 테슬라의 기가팩토리와 협력하고 있는 파나소닉을 비롯해 일본 전자왕국의 전성기를 누린 올드보이들이 조금씩 비상의 드라마를 쓰기 시작한 것도 사실이다.

비결이 있을까? 일본 전자왕국은 전통의 부품업체로 군림하며 글로벌 하드웨어 기술발전을 선도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는 모든 사물이 연결되어 유기적으로 작동하는 초연결 생태계 전략의 문을 넘을 수 없다. 이에 따라 이들은 소위 4차 산업혁명의 소프트웨어 파워를 담아낼 수 있는 하드웨어 일부를 자기들이 갖고 있던 기술력으로 메워 연결하는 방법론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기술력으로 기존 부품의 조합이나 통합을 유도했다.

여기에는 기술이 중심이 된 일본 특유의 조직문화도 큰 역할을 한다. 2002년 타임지는 소니의 몰락을 보도했으나 2022년의 타임지는 어떤 상황을 보도할까? 글로벌 전자업계의 공수교대가 이뤄졌다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