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인터넷 역사를 풍미했던 포털 사이트 야후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13일(현지시간) CNN머니 등에 따르면 버라이즌이 야후를 44억8000만달러에 인수하는 계약을 최종 체결했으며, 독립회사 야후의 존재는 사라졌다고 보도했다. 최초 버라이즌 야후 인수 소식이 나온 지 근 1년 만의 일이다.

야후의 마지막 단말마, 마리사 메이어
야후는 월드와이드웹(WWW) 시대를 풍미했던 포털 사이트의 원조다. 하지만 후발주자인 구글의 반격에 휘청이는가 싶더니 페이스북을 중심으로 인터넷 권력이 SNS로 이동하는 순간 직격탄을 맞았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온라인에서 모바일, 그리고 초연결로 이어지는 큰 그림을 놓친 대목이 뼈 아프다.

하지만 야후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최후의 카드인 마리사 메이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등장은 극적이었다. 2012년 7월12일, 로스 레빈슨 당시 야후 부사장은 본사 회의실에서 이사회에 참여했다. 흔들리는 미래를 재정비하고 자신이 중심이 된 야후의 가치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짐 해커만을 비롯해 샤시 세스, 탐모스, 미키로센 등 당시 야후의 핵심임원들은 모두 로스 레빈슨의 편이었다.

초반 분위기는 좋았다. 하지만 로스 레빈슨이 야후의 미래를 위해 1만명의 직원을 구조조정하고 50% 이상의 수익 개선을 이뤄내겠다고 발표하는 순간 이사들의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이후 외신을 통해 알려진 바에 따르면 로스 레빈슨이 프리젠테이션을 하던 중 야후의 주식 5%를 가진 써드 포인트 헤지펀드의 댄 롭을 바라보았으나 댄 롭은 말없이 블랙베리를 만지작거리거나 화장실을 간다며 10분 동안 자리를 비우기도 했다.

이후 이사들의 날 선 질문이 이어졌고, 회의를 마친 로스 레빈슨은 구글의 마리사 메이어가 야후 CEO 인터뷰를 진행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 마리사 메이어. 출처=야후

당시 37세인 마리사 메이어가 야후의 CEO가 된 날은 2012년 7월20일이다. 그녀는 1975년 5월30일 핀란드 출신의 예술가인 마가렛 메이어와 엔지니어인 마이클 메이어의 딸로 태어났으며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에서 성장했다고 한다. 이후 스탠퍼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구글에 입사해 엔지니어와 디자이너, 상품 기획자를 거쳐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승진을 거듭해 결국 부사장에 이른다.

여기까지만 봐도 놀라운 성공이지만 마리사 메이어는 '독이 든 성배'라는 평가를 받던 야후의 수장직을 수락하게 된다. 당시 그녀의 취임일성은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인터넷의 정의를 처음으로 내린 야후와 함께하고 싶었다"

마리사 메이어가 수장이 된 야후는 극적인 변신을 거듭했다. 400억달러에 달하는 알리바바의 주식을 스핀오프(특정사업 부문의 분사)한 후 2013년에는 이미지 중심 SNS 업체인 텀블러를 인수하기도 했다.

그녀가 등장한 후 야후의 근무환경도 급변했다. 구글 재직 당시부터 지독한 워커홀릭이던 마리사 메이어는 오후만 되면 텅 비어버리는 사내 주차장을 보며 직원들의 모럴해저드에 분노했다고 한다. 그녀는 야후 CEO로 영입될 당시 임신 7개월의 몸이었으나 부임 3개월 후 9월30일 아들을 출산한 이후 단 2주 만에 출근해 밤샘회의를 열어 직원들을 독려하는 ‘무시무시한 열정’을 보여주기도 했다. 당시 여성단체들이 마리사 메이어의 지독한 업무 스타일이 출산휴가 보장이라는 근간을 흔든다고 비판할 정도다.

하지만 야후는 생각처럼 살아나지 못했다. 2015년 6월 지도 서비스 전용 사이트를 폐쇄하며 사업 구조조정에 나서야 했으며 마리사 메이어의 역작으로 여겨지는 텀블러 인수는 최악의 실패로 남았다. 현재는 명맥만 유지하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대실패였다.

이후로는 계속 내리막길이다. 검색사업은 동력을 확보하지 못했고 사업 다각화와 모바일 퍼스트 전략은 번번히 경쟁자의 견제에 가로막혔다. 야후에 투자중인 헤지펀드 스타보듀 벨류가 "현 이사진이 빠르게 회사를 정상화 시키지 못할 경우 연내 이사진 9명을 새로 선발하겠다"는 엄포를 놓을 정도였다. 이런 상태에서 마리사 메이어의 야후는 지난해 백기를 들고 시장의 매물로 전락하는 처지가 됐다.

우여곡절끝에 야후의 새주인으로 버라이즌이 낙점되었으나, 이번에는 사상 최악의 해킹사태가 발목을 잡았다. 올해 초 미국 정부가 지난 2013년과 2014년 4월 야후에서 대규모 해킹이 발생했다는 발표를 했기 때문이다. 이용자의 이메일 주소, 야후 계정 비밀번호, 생일 등의 정보가 빠져나갔으며 야후 계정 10억개가 유출된 것으로 알려졌다. 버라이즌 피인수를 주도하던 로날 벨(Ronald Bell) 야후 법무 자문의원은 해킹 사건과 관련해 미국 정부의 조사를 받고 퇴사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후는 무사히 버라이즌의 품에 안겼다. 이에 13일(현지시간) 마리사 메이어 CEO는 사내 이메일을 통해 자신이 물러난다는 사실을 밝히며 "여러분과 함께 한 시간은 추억과 감사함, 미래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다”는 소감을 남겼다. 버라이즌은 야후 직원 15%에 달하는 2100명을 감원할 계획이며 마리사 메이어는 2300만달러의 퇴직금을 받는다.

▲ 출처=플리커

버라이즌은 왜?
야후를 품은 버라이즌의 노림수에도 시선이 집중된다. 앞으로 버라이즌은 야후를 통해 어떤 비전을 보여줄까? 전화회사인 벨아틀랜틱(Bell Atlantic)과 장거리전화 통신회사인 GTE(General Telephone & Electronics Corporation)가 합병하면서 공식적으로 출범한 버라이즌은 2015년 AOL(아메리카온라인)을 인수한 바 있다. 이는 야후의 인수 배경을 살피는 중요한 키워드다.

PC 통신과 초고속인터넷 서비스로 시작한 AOL은 테크크런치, 허핑턴포스트, 엔가젯 등을 거느린 종합 콘텐츠 기업이다. 여기서 2011년 AOL이 인수한 허핑턴포스트는 버라이즌에게 어떤 의미일까. 업계는 버라이즌이 AOL을 인수한 배경을 두고 광고 플랫폼 강화가 최우선 목적이라고 본다.

버라이즌의 AOL 인수 발표 후 암스트롱 AOL CEO가 직원들에게 “버라이즌이 우리에게 관심을 보인 주된 이유가 바로 허핑턴포스트였다”고 밝혔지만 이는 '듣기좋은 말'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버라이즌은 온라인 동영상 광고 중개 업체인 애댑TV와 광고효과 측정전문기업인 컨버트로를 인수하며 광고 플랫폼 강화에 집중했으며, AOL이 가진 허핑턴포스트와 같은 콘텐츠 기업에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심지어 버라이즌은 콘텐츠 사업, 특히 언론사업에는 흥미가 없다. 한 때 IT전문매체인 수가스트링을 의욕적으로 운영했지만 소속 기자가 버라이즌의 아킬레스건인 망 중립성 논쟁을 기사로 쓰자 개설 2개월만에 폐쇄해버리며 상당한 논란에 휘말리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버라이즌은 AOL의 경쟁력을 광고 플랫폼 강화로 이해했고, 콘텐츠 사업에 대해서는 약간의 비토정서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 탈통신 기조를 더하면 야후 인수의 배경을 확인할 수 있다. 컴캐스트가 NBC유니버설을 인수하고 AT&T가 위성방송인 디렉TV를 품어내는 것처럼, 광고 플랫폼을 강화시킨 버라이즌이 탈통신이라는 키워드로 야후를 품어내 '이제야' 강력한 미디어 플랫폼 회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시너지 여부는 아직 예단할 수 없다. 특히 AOL의 막강한 콘텐츠 인프라를 확실하게 잡아내지 못한 상태에서 무작정 탈통신 기조만 강조한다고 순식간에 파괴적인 미디어 플랫폼 회사가 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까지 사업의 마인드로만 이해했던 허핑포스트, 엔가젯 등이 보여주는 ICT 방법론을 야후의 플랫폼 노하우와 결합하면 나름의 길은 있다는 말도 나온다. 귀추가 주목되는 이유다.

▲ 오스 로고. 출처=버라이즌

한편 남겨진 야후는 알타바(Altaba)로 남으며 버라이즌의 품에 안긴 야후 리소스(자원)은 오스(Oath)로 새롭게 태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