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조 공화국이 오래 갈 수 없었던 이유는, 다테 번이 에조 공화국을 건설하자 유신 3걸이라 불리며 메이지 유신을 이끌던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이 전쟁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에조치에서 에조 공화국을 세운 막부 잔당들을 토벌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사이고 다카모리를 중심으로 한 왕정복고파가 군대를 동원하려는 순간 간악한 술수를 고안한 것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다. 그 당시 이토 히로부미는 역시 유신 3걸 중 하나인 기도 다카요시의 최 측근이었다. 그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막후교섭을 이끌어 냄으로써, 일본인들끼리의 전쟁으로 인한 전력을 낭비할 것이 아니라 그 전력을 이용하면 홋카이도를 병탄할 수 있다는 계산을 하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수족처럼 부리던 사무라이인 무쓰 무네미쓰에게 밀명을 내려 마쓰마에 가네히로의 침실로 잠입해서 목에 칼을 겨누고 일가족을 몰살시킨다고 위협함으로써, 반 막부파의 신정부군과 전쟁이 벌어지면 전쟁을 하는 시늉만 한 후 항복을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결국 막부를 지지하며 막부로부터 얻어낸 기득권을 놓기 싫어서 끝까지 남아서 아등바등 거리던 잔당들과 마쓰마에의 에조 공화국은 하코다테 전투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그러나 하코다테 전투를 위해서 파견된 신정부 군대가 에조치에서 철수하지 않은 것은 물론 막부의 잔당들과 함께 북진을 시작했다. 생전 전쟁이라는 것을 겪어보지 못한 아이누족들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지만 일본군은 마을에 불을 지르고 눈에 보이는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총으로 쏘고 칼로 베어버렸다. 이참에 섬 전체를 자신들의 영토로 만들 작정이었다.

저항도 못하는 아이누족의 남자들과 여자들은 물론 어린아이까지 일본군과 맞닥뜨리는 순간 죽어 넘어졌고, 젊은 여자들은 무차별로 강간을 당한 후 그 자리에서 또 칼로 베어졌다. 지아비를 죽일 때, 지아비의 죽음을 말리기 위해서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매달리는 아녀자를 남편이 죽어가면서 채 눈도 감지 않은 앞에서 겁탈하는가 하면, 아비의 죽음과 어미를 겁탈하는 장면에 놀라서 울고 있는 자식은 시끄럽다고 죽여 버렸다. 차마 인간으로는 저지를 수 없는 살육과 만행을 자행한 것이다. 그 와중에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이 용할 정도였다.

일본이 그나마 아이누족을 전멸시키지 않고 남겨 놓은 이유는 아이누족의 명맥을 이어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을 살려 놓아야 자신들에게는 낯선 땅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제반 안내도 받을 것이고, 그들의 노동력을 이용해서 에조치를 개발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아이누족이야말로 에조치를 개발할 수 있는 자원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굳이 한 가지 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국제사회에 대한 만약의 조치였다. 만일 러시아나 혹은 기타 나라가 국제적인 문제를 들고 나온다면 아직 홋카이도에는 아이누족이 살고 있고 일본은 그들의 근대화를 위해서 도와주고 있을 뿐이라는 핑계를 댈 수 있는 구실을 남겨 놓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핑계를 위한 수단일 뿐, 홋카이도는 섬 전체가 다테 번에 편입되고 말았다. 그리고 1869년 판적봉환 때 마쓰마에는 가장 앞장서서 판적봉환을 함으로써 에조치는 막을 내리고 홋카이도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탄생했다.

에조치가 홋카이도라는 이름으로 바뀌자마자 개발을 시작했다. 아직 살아남은 아이누 족이 살고 있는 땅은 석탄 등 개발된 자원을 운반하기 위한 철도를 놓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강제로 수용한 뒤, 깊은 산골짜기의 땅을 대토라고 주고 개간하라고 했다. 그리고 그나마 개간하지 않으면 환수하겠다고 했지만, 아이누족은 고유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던 관계로 서로 말도 통하지 않는데다가 소유의 개념이 없어서 개발이라는 일본인들의 말 자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결국 아이누 족들은 토지를 비롯한 모든 것들을 수탈당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