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162㎝

 

“동경이란, 출렁이는 물결 속에 살며 시간 속에 고향을 갖지 않는 것. 소망이라는 것은 나날의 시간이 영원과 속삭이는 나직한 대화. 산다는 것은, 시간 중에서 가장 고독한 시간이 하나의 어제에서 떨어져 나와 다른 시간과는 다른 미소로 영원한 것을 말없이 마주할 때까지.”<R.M.릴케 詩, 동경이란(Das ist die Sehnsucht), 송영택 옮김, 문예출판사 刊>

 

샛강 양옆엔 키 큰 수초들이 우거져 미풍에 가벼이 흔들릴 때면 진초록 물결이 밀려오는 듯 한 묘한 감흥을 선사했다.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얕은 물줄기에 반사된 오후의 햇살이 튕겨 올라 하늘거리는 잎들 위에 앉으면 마치 속살을 드러내듯 잎들은 연록의 색으로 부드럽고 온화한 아우라를 연출하는 것이었다.

그때 불현 듯 다소 엉뚱하게도 이별의 소곡(小曲)을 절정으로 토해내던 테너의 희끗한 머릿결이 붉은 조명에 드러나던 그 강렬했던 짧은 기억의 순간이 스쳐갔다. 잎들은 노래하고 잠자듯 흔들리는 그들 사이 간간히 비치는 유연하게 흐르는 물줄기는 유난히 맑고 깨끗해 보였다. 햇살을 가린 그림자가 지난 후, 순간 거침없이 피어오르며 만개하는 여린 꽃잎들의 열림처럼 빛은 더욱 엷은 커튼을 투과하는 부드러움으로 내려앉았다.

 

▲ 116.8×91㎝, 2012

 

어디선가 블라디미르 호로비츠(Vladimir Samoylovich Horowitz) 연주, 쇼팽(Chopin)의 빗방울전주곡(Raindrop Prelude Op.28 No.15)이 들려왔다. 사랑과 이별, 기다림과 그리움, 삶과 죽음의 물방울이 그럼에도 뜨거움으로 대롱거리며 저 선율을 인도하는….

조금은 변덕스러운 날씨가 금세 강렬한 햇빛을 드리웠다. 좁고 긴 강변은 저 멀리까지 휘어진 길을 스스로 드러내 보여주었다. 그런 풍경을 잠시 바라보다 불현 듯 고독감이 밀려드는 것을 겨우 진정시켰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작은 길이 마치 고백편지를 써야만 하는 갑갑함과 허무함이 교차하는 아린심경처럼 덤덤히 버티듯 서 있는 풍경화로 밀려 든 때문이었다.

 

▲ 72.7×60.6㎝, 2013

 

그가 나직하게 독백했다. 누구나 한번쯤 강을 건너게 되는 거지. 어떤 땐 오랫동안 어둡고 깊은 거친 물살을 만나기도 하고 잔잔한 호숫가에 앉아 나뭇잎 하나 떨어지는 그 엷은 물의 파동을 바라봐야 할 때도 있지.

그러나 생의 흔들림과 떨림은, 지나가는 것. 무심히 현재라는 지금 저 잎에 매달린 물방울을 보아라. 쉽게 지나침은 때론 자아를 가벼이 생각하는 모순에 빠지는 것과 다르지 않단다. 물방울을 흔들며 함께 빛나는 영롱한 저 빛의 생동 저 작은 완전에, 노크해보렴.

 

▲ 생명의 빛-소리, 97×162㎝ oil on canvas, 2012

 

◇흘러가는, 물의 파편

다시 천천히 걷는다. 그렇게 가고는 있지만 자꾸 가슴으로 두 손이 모아진다. 위안이 필요한 것인가. 물방울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강물위에 떨어질 듯 건반은 격정의 울림으로 치닫는다. 소리에 마음에 너와 나의 말에 그리고 이 순간에, 모든 것이 흘러간다.

선율은 오후의 석양을 물위에 비추고 젖은 숲길 가늘게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처럼 그대이름을 뜨겁게 뜨거움으로 쿵쾅거리며 부르는데. 오오 이 무슨 기묘한 불안의 선율인가. 영롱하고 따스한 촉감처럼 물방울이 떨어져 튕겨오를 때 물의 파편들이 흩어져 살갗에 와 닿는 이 미묘한 차가움은!

△권동철/경제월간 인사이트코리아(INSIGHT KOREA), 2017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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