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원하는 걸 카드는 알고 있다


신용카드는 시대의 거울이다. 가로 8.5cm, 세로 5.4cm, 6개의 작은 단층(layer)으로 구성된 이 플라스틱 카드는 동시대 사람들의 ‘취향’이나 ‘가치 지향’을 엿보는 ‘창’이다.

미국 시카고의 사업가인 ‘프랭크 맥나마라(Frank McNamara)’가 세계 최초로 고안했으며, 국내에서는 지난 1969년 첫선을 보인 신세계 백화점 카드가 신용카드의 효시이다.

지갑을 집에 두고 온 걸 모르고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다 망신을 당한 맥나마라의 ‘수난’이 훗날 가계의 소비 여력을 획기적으로 높여 세계 경제의 호황에 기여하는 이 마법의 플라스틱 출시의 밑거름이 된다. 말 그대로 전화위복인 셈이다. 신용카드는 국내에서 카드 발급 1억장시대를 앞두고 있다.

카드시장은 총알이 난무하는 격전장이다. 신상품 출시가 봇물을 이루면서 소비자들의 지갑을 파고들기 위한 카드사들의 ‘참호전’도 치열하다. 첨단 마케팅은 적정을 살피고, 고지 탈환을 노리는 카드사들의 ‘필드 매뉴얼’격이다.

‘시장분할(segmentation)’이 첫 단추이다. 인구학적 특성과 소비습관의 상관관계를 전제로 한 시장분할은 소비자들을 소득 수준, 기호, 취미 등을 공유하는 집단으로 구분한다. 그리고 개별 시장을 집중 공략한다.

전국 시대의 명장으로 오자병법을 남긴 오기가 진, 제, 한 등 경쟁국 군대의 특성을 병사들의 기질, 보상시스템 등으로 구분해 맞춤형 전투방식을 채택한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시장분할의 가장 단순한 형태가 소비자를 남·녀로 구분해 그 특성을 파고드는 방식이다.

신한카드의 여성 전용 카드인 ‘레이디 카드(Lady Card)’가 초보적인 시장분할의 대표적 실례이다. 이 카드는 백화점·할인점·패밀리 레스토랑 등을 자주 이용하는 여성들을 겨냥했다. 아웃백이나 씨즐러 등을 이용할 때 20%, 박준뷰티랩·이가자 미용실 등에서도 할인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삼성카드의 애니패스 카드는 부서 회식, 음식점, 노래방 등을 이용하는 남성 소비자들에게 포인트를 두 배로 부여하고 있다. 세대별 공략은 또 다른 시장분할 방식이다. 신한카드의 2030카드, 그리고 4050 카드가 이 범주에 속한다.

연령대가 서로 비슷하면 취미나 소비습관, 기호 등이 대략 일치할 것이라는 가정을 반영한다. 세대 공략은 연령대가 서로 비슷한 고객들을 평생 관리하는 이른바 ‘해리포터 마케팅’으로 진화하기도 한다.

해리포터 마케팅은 프랑스의 화장품 업체인 로레알이 네슬레와 공동투자한 ‘이네오브(Inneov)’가 선보인 브랜딩 방식이다. 젊은 시절 디스코텍에서 몸을 흔들거나, 아바의 음악에 미친 듯이 춤을 추어본 적이 있는 비슷한 연령대의 여성들은 세대적 동질감을 더 쉽게 공유한다.

2030카드 소유자들도 세월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4050카드로 옮겨갈 수 있다는게 이회사 이상후 R&D센터 대리의 설명이다.

국내 카드사들은 초보적인 시장분할 수준에서 출발했으나, 지금은 해외 카드업체들 중에서도 적수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성장했다는 것이 카드업계의 자평이다.

명멸하는 트렌드에 따라 새로운 소비시장을 포착하는 업다운(up-down) 방식 시장개척의 고수들이다.스크린 골프 열풍을 정조준한 카드상품을 출시한 신한카드가 대표적 실례이다.

스토리 마케팅도 최근 각광 받는 영역이다. 소비자들의 정보 수용 방식을 재조명한 ‘뉴로 사이언스’(Neuro Science)의 성과를 반영했다. 사회심리학자인 로버트 쉥크(Robert Schank) 교수는 소비자들이 스토리에 비춰 새로운 팩트를 수용하고 인덱싱(indexing)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뉴로 사이언스 성과도 반영
수익성이 높은 프리미엄 시장 공략도 속도를 더하고 있다. 연회비가 200만원에 달하는 현대카드의 ‘블랙카드’가 선두주자이다. 세계적인 산업 디자이너로 널리 알려진 ‘카림 라시드’의 디자인을 적용했다.

이 회사는 비욘세, 페더러를 비롯해 글로벌 무대에서 활동하는 유명 스포츠 스타나 엔터테이너들을 초청하는 등 거침없는 행보로 경쟁사들을 압도한다.

연회비 20만원의 신한카드 ‘더 베스트 시그니처 등도 빼놓을 수 없다.
프리미엄 마켓 공략은 수익성이 높은 시장을 공략해 ‘성장’과 더불어 ‘브랜드 가치’를 제고해 안정적인 성장기반을 확보하려는 국내 카드사들의 전략적 판단의 결과이다.
매스 마켓의 강자로 통하는 자동차업체들이 저마다 프리미엄 시장에 출사표를 던지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엇비슷한 카드 상품 출시가 봇물을 이루면서 디자인이나 색상, 재질 등으로 시선을 사로잡는 제품 출시도 봇물을 이룰 전망이다. 향기나 빛을 내는 카드가 대표적이다.
집단지성을 카드 제작에 반영한 사례도 있다.

삼성카드의 ‘셀디(Self Design)카드’는 본인이 직접 찍은 사진이나 이 회사가 제공하는 사진을 신용카드 배경으로 사용할 수 있다. 신용카드 앞면에 인쇄될 이미지를 직접 고르고 취향에 맞게 편집해서 결정할 수 있는 외환은행의 ‘프리디자인카드’도 눈길을 끈다.

이 밖에 카드 보유자의 건강 상태를 색깔의 변화로 알려주는 카드나, 기분을 좋게 하는 향기가 솔솔 풍기는 카드도 등장할 전망이다.
대량 메모리 칩과 디스플레이 기능을 접목한 KB카드의 ‘엔디카드’도 있다.

서비스 선택하는 비서형 카드 등장
아마존이나 넷플리스(Netflix)는 신용카드의 미래를 엿보는 창이다. 이 온라인 기업의 홈페이지를 방문한 소비자들은 도서(아마존)나 비디오 상품(넷플릭스)을 추천받는다.

소비자들의 기호 분석을 위한 알고리즘을 장착한 컴퓨터 시스템이 자동적으로 상품을 권유하는 방식이다.

이들 온라인 기업들은 회원들에게 일대일 서비스를 제공한다. 경영학자 게리 하멜의 《경영의 미래》를 구입한 독자들에게 같은 저자의 《리딩 더 레볼루션》을 추천하는 것이다.

그 핵심은 고객의 데이터베이스를 분석해 미래의 소비를 예측하는 모델이다. 넷플릭스는 ‘시네매치(Cinematch)’라는 이름의 시스템을 구축해 방문객들에게 영화를 추천한다. 국내 신용카드사들도 맞춤형 서비스시장을 주시하고 있다.

장기적으로 골프, 영화, 문화공연, 와인 등 선호하는 서비스를 골라 입맛대로 구성할 수 있는 맞춤형 카드도 등장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네티즌들이 온라인 뉴스사이트에서 자신이 선호하는 뉴스만 골라 맞춤형 페이지를 꾸미듯이 말이다.

박영환 기자 blade@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