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쉐보레의 순수 전기차 ‘볼트 EV’. 한국지엠은 GM이 이 차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 출처 =한국지엠

내수 판매 부진과 수출 물량 축소로 어려운 경영 환경에 처한 한국지엠이 임금협상이라는 최대 고비를 만났다.

영업 적자가 지속돼 마케팅 활동에 제약을 받는 와중에도 노조 측은 무리한 수준의 임금 인상과 성과급 지급을 요구하고 있다.

단기적으로는 올해 협상을 성공적으로 매듭 지으며 ‘급한 불’을 끄고, 장기적으로는 노-사 관계 전반에 대한 혁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제임스 김 한국지엠 사장의 리더십이 시험대 위에 오른 모양새다.

‘성과급 500%’ 3400억원 요구한 노조

업계에 따르면 한국지엠 노사는 지난달 말 상견례를 가지고 본격적으로 올해 임금협상을 시작했다.

노조는 ▲기본급 15만4883원 인상 ▲통상임금 500%에 해당하는 성과급 지급 ▲8+8 주간 연속 2교대제 및 월급제 시행 ▲사무직 신규인원 충원 ▲평일 시간 외 수당 지급 ▲만 61세까지 정년 연장 ▲비정규직 처우 개선 ▲퇴직금 연금제 시행 등 조건을 요구하고 있다.

단체협약은 내년으로 예정된 만큼 올해는 임금 협상이 주요 논의 대상이 될 전망이다. 급여 인상폭과 통상임금 지급 규모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지난해 임단협 당시에는 기본급 8만원 인상, 격려금 650만원 즉시 지급, 성과급 450만원 연말 지급 등 안에 노사가 합의했다.

올해는 기본급 인상 폭이 두 배를 넘고, 성과급 규모도 대폭 늘어난 것이다. 노조가 이번에 요구한 성과급을 금액으로 환산하면 약 2125만원이다.

현재 현장에서 일하는 한국지엠 조합원은 약 1만명, 사무직이 2000~3000명인 것으로 추산된다. 성과급 지급이 확정될 경우 약 1만6000명의 직원에게 혜택이 돌아간다.

단순 계산하면 성과급으로만 약 3400억원을 지출해야 하는 셈이다. 이는 2015년 회사 국내 영업 매출액(약 2조5500억원)의 약 13%에 해당하는 수치다. 임금인상분도 월 25억여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누적 적자 1조3000억원···여유 없는 한국지엠

문제는 한국지엠의 현재 경영 상황이 여의치가 않다는 점. 이 회사는 지난 2014년 1486억원, 2015년 5944억원, 2016년 5312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최근 3년간 누적 적자가 1조3000억원에 달하는 것이다.

올해는 재무적인 압박도 존재한다. 한국지엠은 지주회사인 GM 홀딩스 LLC로부터 1조8875억원의 금액을 차입했다. 이 중 7220억원을 올해 안에 상환해야 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영업 일선 분위기까지 침울하다. 경쟁 심화와 신차효과 부진 등으로 쉐보레의 지난달 국내 판매량(1만1854대)은 전년 동월(1만7179대) 대비 31%나 빠졌다. 제너럴모터스(GM)가 쉐보레 브랜드의 유럽 철수를 결정하면서 수출은 매년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한국지엠의 1~5월 누적 판매 실적은 23만5306대로 지난해 같은 기간(25만2435대) 보다 6.8% 줄었다.

판매 부진은 고스란히 공장 가동률 저하로 이어졌다. 특히 준중형차 크루즈와 다목적차량(MPV) 올란도 등이 만들어지는 군산공장의 경우 수년째 가동률이 50% 수준에 머물고 있다. 일각에서 GM이 연산 25만대 수준인 군산공장의 문을 닫고 순차적으로 한국 시장에서 철수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는 배경이다.

‘임금 협상’ 테이블에 앉은 제임스 김 사장

새롭게 바뀐 정권이 기업보다는 노동자의 처우 개선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점 등도 사측을 압박하는 요소다.

결국 취임 2년차를 맞은 제임스 김 사장이 노조를 잘 설득해야 하는 숙제를 떠안게 된 그림이다. 그는 한국지엠으로 영입되기 전 IT회사에서 각종 인력조정이나 조직개편 등을 통해 어려운 회사의 실적을 끌어올린 경험이 풍부하다.

제임스 김 사장은 지난해 임단협 협상 테이블에도 앉아 노사 합의를 이끌어낸 바 있다. 당초 노조는 기본급 15만원 인상, 통상임금의 400% 성과금 지급(약 1800억원) 등을 요구했지만 총 30차례 교섭 이후 기본급 8만원 인상, 격려금 650만원 즉시 지급, 성과급 450만원 연말 지급 등에 합의했다.

이 과정에서 노조는 14차례 파업을 진행했고, 회사 측 추산 1만5000여대의 생산 차질의 손해를 봤다. 올 뉴 말리부 등 신차가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시점에 공장이 멈췄던 것이다.

한국지엠 관계자는 “원만한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 한국지엠은 최근 배우 신구씨를 주인공으로 스파크 광고를 새롭게 제작하는 등 마케팅 활동에 힘을 쏟고 있다. 새롭게 만들어진 광고는 각종 온라인 채널에서 150만건이 넘는 조회수를 기록하는 등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 출처 = 한국지엠

큰 출혈 없이 노사가 뜻을 모을 경우에는 한국지엠의 하반기 내수 시장 집중 마케팅에 탄력이 붙을 것으로 기대된다.

중형 세단인 쉐보레 말리부는 국내 시장에서 꾸준히 인기를 끌며 실적을 견인하고 있다. 이 가운데 회사의 약점으로 지적받는 라인업은 경차, 준중형차,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등이다.

특히 크루즈의 경우 올해 초 신차가 투입됐음에도 가격 이슈 등으로 월간 판매가 1000여대 수준에 그치며 기대 이하의 실적을 내고 있다. 크루즈의 성공은 군산 공장의 존폐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주력 경차인 스파크의 판매가 지난해 대비 50% 이상 급락하고 있는 것도 해결책 마련이 필요하다.

이에 한국지엠은 배우 신구씨가 출연한 스파크의 새로운 광고를 제작하며 마케팅 활동을 강화하는 한편 ‘80만원 할인 또는 120만원 상당의 건조기 증정’이라는 파격적인 판매 조건을 내걸었다.

크루즈에도 선착순 2000명을 대상으로 100만원 할인 혜택을 제공해 고객 유치에 나선다. 한국지엠 관계자는 내수에서 적극적인 판촉 활동을 진행하면서 6월 초 영업 전선 분위기가 상당히 좋아졌다고 귀띔했다. 

회사 상황 어려운데···“노조는 왜?”

모순되게도 노조는 한국지엠이 어려운 경영 환경에 처했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무리한 임금 인상을 요구를 하고 있다는 게 업계 안팎의 분석이다.

한국지엠의 가장 큰 고민은 수출 물량 감소다. 글로벌 GM이 유럽에서 판매하는 쉐보레 물량을 한국 공장에서 만들었는데, 현지에서 영업점을 철수하면서 후폭풍이 닥친 것이다.

여기에 북미 시장 위축으로 현지 수출 물량까지 줄며 수요가 더 빠졌다. 2014년 47만6151대였던 한국지엠의 수출은 지난해 41만6890대로 떨어졌다. 내수 시장에서도 스파크 등 주력 모델의 부진으로 판매가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올해 1~5월 내수 판매량은 6만1253대로 지난해 동기(6만8721대) 보다 10.9% 감소했다.

생산 현장에서 근로자를 더 채용하거나 공장 가동률이 이전보다 올라갈 가능성이 적다는 뜻이다. 언제든 구조조정 대상자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당장 급여를 많이 받아야 한다는 ‘보상 심리’가 나타나게 된 원인으로 풀이된다.

지난해 단체협상 과정에서 ‘월급제 도입’을 두고 노사가 팽팽한 줄다리기를 했다는 점도 이 같은 의견에 힘을 보탠다.

한국지엠은 최근 공장 가동률이 떨어졌기 때문에 휴업이 잦은 편이다. 물량이 없어 공장 문을 닫을 경우 노동자들은 보험에서 보장된 급여 일부만 받는 것으로 전해졌다. ‘월급제’를 도입하면 휴업을 해도 100% 급여를 보장받게 된다.

노사는 이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를 2018년 단체협상에서 진행하기로 합의했다. 이 때문에 노조가 올해 임금 협상 과정에서 일정 수준 양보를 한 뒤, 월급제 등에 대한 논의는 주도권을 가져가겠다는 계산을 하고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 제임스 김 한국지엠 사장 / 출처 = 한국지엠

“노사관계 혁신 절실”

한국지엠이 올해 당장 수천억원의 비용 부담을 덜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중·장기적으로 노사 관계에 대한 혁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업계 한 관계자는 “한국지엠은 경차, 소형차 등의 글로벌 생산 및 기술 개발을 담당하는 곳으로 GM 입장에서 구미가 당길 만큼 경쟁력 있는 협력업체 네트워크도 다수 지니고 있다”며 “최근 글로벌 시장에서 이슈를 몰고 다니는 볼트 EV 역시 한국지엠이 전기차 개발을 주도적으로 해낸 결과”라고 언급했다.

이어 “글로벌 GM 내에서 위상이 나쁘지 않은데, 유일하게 단점으로 지적받는 것이 생산 효율성 문제”라고 진단했다.

국내 시장에서 초기 돌풍을 일으킨 준대형 세단 임팔라가 현재가지 수입·판매되고 있다는 사실이 대표적이다. 당시 GM 본사는 초기 투자 비용과 생산 비용 등을 저울질하다 인건비 등을 문제로 들어 국내 공장에 임팔라 생산 물량을 주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지엠이 직접 개발을 주도한 볼트 EV가 국내 공장에서 만들어지지 않은 것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김필수 대림대학교 자동차학과 교수는 “한국지엠이 당면한 가장 큰 과제는 결국 내수 시장 판매량을 높이는 것”이라며 “경쟁이 치열한 한국에서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결국 상품성을 높이는 작업이 수반돼야 한다. GM이라는 글로벌 기업의 차량이긴 하지만 한국식으로 개발·보완하거나 자체적인 차종을 연구하는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어 “르노삼성의 경우 최근 몇 년간 무분규로 임금 협상을 타결하고 있다. 과거 어려운 시기를 조합원들이 함께 이겨내자는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며 “이에 SM6·QM6 등 경쟁력 있는 신차를 개발할 수 있는 여력이 생기고, 부산 공장 가동률이 올라가고, 회사가 발전하게 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업계 한 관계자는 “노조 입장에서는 매년 적자를 내면서도 회사가 성과급을 줬으니 올해도 달라는 논리를 펼치는 게 당연하다”며 “매년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는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