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62세의 H씨는 지난 2008년에 부당한(?) 세무조사로 인해 사업을 정상적으로 운영하지 못한 채 회생신청을 했다. 사업소득에서 회사 운영비를 빼고 10년 동안 갚기로 한 회생계획은 채권자들의 동의를 받아냈다.

'성실하지만 불운한' 채무자

과세당국은 H씨가 허위 매입세금계산서를 받아 세금을 포탈했다는 이유로 약 83억원의 세금을 부과하고 검찰에 고발했다. H씨는 조세불복절차를 밟아 1심에서 승소했고 현재 2심을 진행중이다. 2심 재판에서 행정법원은 H씨의 파산절차 결과가 나올 때까지 재판을 중단한 상태다. 형사재판에서는 1,2심 모두 무죄선고를 받았다. 

조세소송과 언제 구속될지 모르는 형사소송에서 H씨는 점점 몸과 마음이 지쳐갔다. 설상가상 온 몸이 비대해지는 병마와 싸우게 됐다. 그의 아내는 척추종양으로 몸져누웠다. 정상도 아닌 몸이지만, 아내는 같이 누워 있는 장모를 부양하고 있다.

H씨의 처남은 H씨를 못마땅해 했다. H씨의 처남 S씨는 누나에게 빚더미만 안겨 준 매형이 서운했다.  지난 2011년 처남 S씨는 자신이 전세보증금을 내 누나의 거주지를 마련해 주었다. 사실상 장모의 주거지를 마련해 준 것이다.

당시 H씨는 운영하던 공장 기숙사(수원소재)에서 기거했다가 공장이 경매로 넘어가면서 집을 왕래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H씨는 3년 가까이 회생절차를 통해 채무를 상환했지만 더 이상 사업운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약 45억원의 금융채무를 진채 2015년 서울회생법원에 파산신청했다.

▲ 서울회생법원 사진=이코노믹 리뷰 DB

'통신내역'까지 제출하라는 법원

파산신청 후 H씨는 법관이 위촉한 파산관재인으로부터 재산조사를 받았다. 파산관재인은 빼돌리거나 은닉한 재산이 있는지 조사하고 판사에게 보고한다.

회생절차와 파산절차를 거치는 동안 신용보증기금등 5군데 채권기관에선 어떤 이의신청도 하지 않았다.

H씨는 이렇다 할 재산이 없는 상태다. H씨가 사업상 소유한 공장과 부지는 모두 경매로 넘어갔다. 그 외 H씨의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상속한 공시지가 기준 4만원짜리 한 움큼의 땅이 그의 전 재산이다.

파산관재인 L변호사는 H씨의 배우자와 장모가 살고 있는 집의 전세보증금의 형성경위를 집중적으로 조사했다. 관재인은 전세보증금 3억2천만원이 H씨의 소유가 아니냐고 다그쳤다. 그는 H씨에게 자신의 소유가 아님을 입증하라고 요구했다.

H씨는 전세보증금이 H씨의 돈이 아니라고 해명하기 위해선 손아래 처남에게 자금 출처와 입출금 통장 내역서를 요구할 판이었다. H씨는 아픈 아내에게 넌지시 처남에게 부탁할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아내 역시 관재인의 요구를 처남에게 말할 처지가 아니었다. 동생이 마련해 준 보증금에서 살고 있는 처지에 그 보증금을 어떻게 마련했는지 그 내역까지 알려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지나친 것이었다. 남편과 동생이 틀어진 사이인 마당에.

H씨의 아내가 동생인 송씨에게 어렵게 요청해 얻은 것은, S씨가 집주인에게 보증금을 송금한 거래내역서뿐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파산관재인은 H씨의 진술이 거짓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  서울회생법원 소속 L 판사(파산관재인 L변호사와는 다른 사람)에게 H씨의 면책을 허락해 달라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의견서의 받아 본 L 판사는 생각이 달랐다. L 판사는 H씨에게 `뜬금없이` 발신기지국이 표시된 채무자명의 휴대전화의 1년치 사용내역을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 지난 2017년 3월에 있었던 일이다.  지난 2월 서울회생법원에 부임한 L 판사는 전임지에서도 종종 파산신청자에게 통신내역을 내놓으라고 한 것으로 알려졌다.  

H씨는 신청대리인인 K 변호사에게 판사의 명령의도를 물었다. 발신기지국이 표시된 통신내역을 요구하는 것은 주로 거주하는 곳을 알아보기 위함이라고 K 변호사는 설명했다.

공교롭게도 H씨는 거주하던 공장이 경매로 넘어가 마땅한 거처가 없어 아내와 자식이 있는 집과 공장을 왕래했었다. 통화내역은 규정상 6개월분 밖에 발급해 주지 않았다. 공장 기숙사를 명도해주기 전, 공장 기숙사에 거주했을 당시 발신기지국 통화내역은 발급되지 않았다.

법원은 H씨에게 거주지에 대한 설명과 아내가 살고 있는 전세보증금에 대한 형성경위를 재차 설명하라고 명령했다.  H씨는 사정을 얘기했지만 H씨의 파산관재인은 그같은 설명으로는 판사를 납득시킬 수 없다고 판단,  L 판사에게 제출하는 의견서를 고쳐 면책을 허가하지 말라고 보고했다. 판사의 지휘로 파산관재인의 의견이 '면책허가'에서 '면책불허가'로 바뀐 것.

판사의 뜬금없는 요구에 파산관재인의 입장이 바뀌어 면책을 받지 못하게 될 상황에 처하자 H씨는 낙담해 있다. H씨는  “내게 없는 것을 어떻게 밝히라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며 답답해했다. 그는 오히려 그 방법을 알려달라고 말했다.

H씨는 "현재 몸이 비대해지는 병으로 인해 거동이 불편하다. 병원을 다니려면 의료보험혜택을 받아야 하는데, 조세 소송 중이라 그마저도 안된다"며 선처를 호소하기도 했다.

회생법원은 채무자 아닌 채권자 후견인?

채무를 지고 파산신청을 할 때 H씨처럼 상황이 진행된다면, 신청인은 인척에게 금융 내역서를 모두 받아놓고 신청을 해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또 파산신청을 하면서 배우자와 별거중이라고 진술했다면, 진행과정에서 배우자와 다시 주거를 같이 해서도 안된다는 얘기다. 언제 법원에서 발신기지국에 표시된 통신내역을 가져오라고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배우자와 화해를 도모해서도 안되고, 집에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이라도 떠돌아 다녀야 하는 걸까.

거주지 보증금은 처남이 자신의 누나와 어머니 거처를 위해 마련해 준 것인데도, 그것이 왜 H씨의 재산이 될까. 회생 판사는 아마도 그 재산이 은닉한 재산이 아닌지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H씨의 채무는 45억원이다. 사업상 빚진 채무다. 과세 소송 1심에서 승소했기에, 부당한 세무조사로 사업이 망했다고 해석할 여지도 있다. H씨의 이 사정에 대해 채권자들은 그 어떤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채권자는 기술보증기금, 신용보증기금, 서울신용보증기금, 중소기업은행, 국민은행이다.

채권자들은 H씨가 채무를 모두 면제받더라도 상관없다는 의미다. 법원의 생각은 채무자는 `완전 알거지`가 되어야 면책해주겠다는 생각에 가깝다. 

파산을 신청하면 채무자의 임대차보증금 3400만원(서울기준)만을 재산으로 인정하고 보호해준다. 면제재산이다. 이 이상 보유하는 재산은 모두 채권자에게 나눠줘야 한다.

지난 27일 서울회생법원에서 열린 개원기념  도산 세미나에서 참석 판사들은 이같은 면제재산 규모가 적다며,  너무 비현실적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미국은 면제제도에 차이가 있지만 주거용 부동산 자체를 보호해 준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당시 발제한 판사는 파산과정에서 채무자가 보유할 수 있는 재산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H씨의 사례를 보면 이같은 발언은 공허하기까지 하다. H씨에게 통신내역을 요구한 L판사도 서울회생법원 소속이다.

▲ 지난 27일 서울회생법원에서 열린 도산세미나에서 발제자들이 주제발표를 하고 있다. 사진=이코노믹 DB

채무자회생법에는 채무자가 파산신청을 하는 경우 면책을 해주지 말아야 될 이유에 대해 몇 가지 행위들을 나열해 놓고 있다.

이 이유를 넓게 해석하면 채무자가 면책받을 기회가 줄어들게 돼 채무자를 경제적으로 갱생시켜야 한다는 면책제도의 취지에 반한다는 게 파산 법조인들의 의견이다.

백주선 한국파산회생변호사회 회장은 “소비자파산신청은 면책을 받으려는 목적이 큰 만큼 의심스러울 때는 채무자에게 유리하게 해석해야 마땅하고, 실질적이고 중대한 면책불허가 사유가 있는 경우에 한해 면책을 불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백 회장은 또 “채무자의 면책으로 가장 크게 피해를 볼 수 있는 채권자들이 면책절차에서 전혀 이의를 하지 않았음에도 면책불허가사유를 적극적으로 심사한 것도 면책 제도의 취지에 반하고, 객관적인 자료없이 타인 명의 재산이 채무자의 소유로 의심된다는 법관의 심증만으로 면책불허가결정을 한 것은 여전히 채권자의 후견적 지위에서 파산절차를 운영하고 있다는 반증”이라고 지적했다. 

현재 20대 국회에서는 파산절차에서 채권자가 이의하지 않는 경우 법원이 심사없이 면책결정을 하도록 하는 채무자회생법개정안이 발의되어 있는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