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책문, 새로운 국가를 묻다> 정조 지음, 신창호 옮김, 판미동 펴냄

 

이 책을 읽으면 우리 사회의 나아갈 방향을 서양의 지도자나 전문가들의 경험과 지식에서 구하려는 식자(識者)들의 습관적 사고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저자가 정조다. 조선 후기의 황금시대를 연 조선 제22대 왕이다. 1776년부터 1800년까지 재위한 이 개혁군주는 국가의 기반을 업그레이드했다. 사회 안정과 경제 발전에 큰 성과를 냈고, 규장각을 설치해 학문을 장려했다. 탕평책을 실시해 당색(黨色)에 구애받지 않고 인물과 실력 중심의 관리를 등용하는 등 대통합정책을 펼쳤다.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문화가 활짝 꽃피는 조선의 르네상스를 만들었다.

<정조책문>은 이런 교과서적 상식을 뛰어 넘는다. 더 깊숙이 정조의 진면목에 다가간다. 책 제목인 책문(策問)은 말 그대로 ‘대책이 뭐냐’고 묻는 질문이다. 정조는 책문을 통해 신하와 유생들에게 국가의 정책과 나아갈 방향에 관한 답변은 물론 심도 있는 연구와 대책 마련을 요구하고 있다.

본디 질문이란 묻는 이의 방향성, 의도, 관심사 외에도 묻는 이의 통찰력과 지성, 품격까지 보여준다. 자신이 뭘 알아야 남에게 제대로 물어 해답을 얻어낼 수 있는 법이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이란 것도 결국 거듭된 질문을 통해 후학이 본질을 스스로 파고들 수 있도록 유도하는 교육법이다.

정조는 과연 무엇을 물었을까. 정조의 문집 <홍재전서>에 수록된 78개 질문을 묶은 <정조책문>에는 사회통합, 지역불균형 해소, 인재등용, 문예부흥, 민생과 복지 등 주요 국정 현안들이 망라돼 있다. 질문은 달랑 몇 줄이 아니다. 정조가 해당 현안과 관련된 배경지식과 현 상황, 문제점 등을 상세히 설명한 다음 어찌 해야 하느냐고 질문을 던지는 방식이다.

정조는 1780년 봄 도기유생들에게 농업 활성화 대책을 묻는다. 정조는 농사의 본질에 대해 먼저 강론한다. “농사는 백성이 잘 살 수 있게 민생을 두텁게 하고 국가의 재정을 풍성하게 만든다.” 농업을 국가의 본업이라고 전제한 것이다. 그런데, 농업이 흔들리고 있다면서 관료들의 무사안일부터 지적한다.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에서는 삼모작이 가능하며, 1년에 2번 누에를 수확하는 것이 기본이지만 영가군(郡)에서는 8번이나 누에고치를 수확할 수 있는 진귀한 종자가 있다고 한다. 어찌된 일인가.” 이어 “논밭길이 개간된 이후 토지를 합쳐 겸병(兼幷)하는 무리가 일어나기 시작했고, 농수로가 폐지되자 관개법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다. 농업을 버리고 상공업으로 향하면서 옥토가 황폐하고 돈이 생긴 서민들조차 높은 관(冠, 모자)에 큰 소매의 옷을 입고 놀고 먹는다”고 농업을 경시하는 풍조를 개탄한다.

그리고 정조가 질문한다. “우리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게 하려면 어찌 해야 하나?” 그러면서 “대책 없이 덤벼들면 바다에 장대를 걸친 길을 가게 될 것”이라며 어설픈 답변을 낼 생각도 말라고 경고한다.

정조는 환곡의 병폐와 관리의 폭정을 막고 나라의 균형발전을 꾀하는 길과 국가의 자원이 낭비되는지 여부도 따져 묻는다. 노인을 공경하고 절기를 따르는 풍습이 바른지에 대해서도 답변을 요구한다. 멀리 떨어진 강원도 전라도 함경도 제주도 등지의 지방 특성에 맞춘 정책에 관해서도 자문을 요청한다.

각 책문에는 정조의 놀라울 정도의 해박함과 날카로운 현실인식이 드러나 있다. 당장의 해법은 물론 먼 미래에 대해서도 고민하는 참 지도자의 자세가 엿보인다. 정조를 ‘이상론자’로 보는 고정관념은 책문 몇 개만 읽어도 송두리째 흔들린다. 정조의 책문 일부를 소개한다. 하나같이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새 정부의 리더들에게도 묻고 싶은 질문들이다.

▲정치적 안정과 혼란은 어디에서 오는가? ▲삶과 정치에 봄의 활력을 불어넣으려면? ▲백성을 편안히 오래 살게 하려면? ▲정치는 무엇을 지향하는가? 사회 정의인가, 개인 이익인가? ▲형식에 얽매이지 말고 정책 대안을 확실하게 제시하라 ▲자신의 재능을 펼칠 수 있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라 ▲현실에 맞는 인재등용 제도를 고안하라 ▲진정으로 공직자다운 태도는 무엇인가? ▲관리들의 근무평정에 엄격하라 ▲문화를 꽃피울 기반은 어떻게 마련하는가? ▲역사는 어떻게 기술해야 하는가? ▲학문을 부흥할 방안은 무엇인가? ▲<춘추>(春秋)를 통해 역사를 알고 바른 정치를 고민하라 ▲굶주리고 헐벗은 백성을 어떻게 구휼할 것인가? ▲본업에 충실해 잘사는 법을 고민하라 ▲본업과 함께 다른 여러 사업으로 민생을 보완하라 ▲노인을 잘 모시고 농부를 격려하는 복지 정책을 고려하라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 주는 정치가 필요하다 ▲국가의 자원을 제대로 등록하라 ▲민생을 챙기는 정책을 재건하라 ▲국가의 지리(地理) 파악이 정치의 기초다 ▲지상에서 중요한 운송수단을 강구하라 ▲해상 운송 대책을 강구하라 ▲동쪽에 치우쳐 있는 강원도의 민심을 살펴라 ▲멀리 떨어진 제주도를 잘 챙겨라 ▲남쪽에 치우친 전라도에 필요한 정책을 고민하라 ▲북쪽 외진 곳에 있는 함경도에 필요한 정책을 제시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