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하다 보면 산전수전 다 겪기 마련이지만 커뮤니케이션 업무를 오래 하면 보통 사람은 상상 하기 힘든 색다른 경험도 하게 된다. 물론 어떤 분야든 오랜 전문가로 일 하는 사람이라면 그 분야에서는 남들이 쉽게 알 수 없는 깊은 경험을 보유하게 된다. 그래서 전문가다. 적어도 10년은 파야 진하고 폭 넓은 경험과 경륜을 가질 수 있다.

10년이라는 기간 정도 해야 1만시간 정도 채우는 거다. 웬만해서는 경험하기 힘든 일까지 두루 섭렵하게 된다. 10년이면 강산이 한번, 세계 경제 트랜드가 두 번 정도, IT 트랜드는 수 십 번도 넘게 바뀐다. 또 그 정도면 재계 순위가 바뀌어도 한참 바뀌게 될 길고도 오랜 기간이다.

 

대학교 학보 기사, 어떤 파장 불러올지 아무도 몰라

20년간 상상도 못할 경험들을 했다. 일했던 회사들마다 여러 가지 심각한 위기 상황이 있었기에 웬만한 커뮤니케이터는 생각지도 못할 일도 겪곤 했다. 기억에 남는 하나가 대학학보사 1면 탑기사 보도를 막았던 일이다. 기업 커뮤니케이션 담당은 기성 언론을 상대하기 마련이다. 대학 학보는 산학연계의 차원이나 인재 모집 또는 기업 소개 같은 정도가 상상이 된다. 하지만 내가 모 대학 학보사와 얽혔던 경험은 차원이 달랐다.

학보사에서 의욕적으로 준비한 탑 뉴스가 게재되는 것을 막아야 했다. 서울에 위치한 K모 대학은 공대로 유명하다. 요즘은 입시 경쟁이 워낙 치열해서 명문대학은커녕 인서울도 쉽지 않다. 그 학교는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그래도 실력 있는 인재들이 공대로 많이 몰리는 편이고 K공대 출신은 인정 받는 편이다. 나의 조카도 H대와 K대를 놓고 고민하다가 K대를 지원했고, 졸업한 뒤 국내 굴지의 중공업 회사에서 QC담당으로 일하고 있다.

이 대학에는 오래 전부터 골치거리가 있었는데 학교법인 재단 이사장의 비리와 각종 전횡으로 전부터 내홍을 겪어 오던 터였다. 사실 이 학교 외에도 국내 여러 학교법인들에서 그런 문제가 속으로 곪고 있기도 했다. 그 학교가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내홍이 오래 되고 심각하기도 했거니와 학교법인 자체가 매각 대상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문 사회면을 통해 더러 거론되기도 했지만, 하루 이틀 된 사안도 아니었기에 크게 이슈가 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알만한 사람은 알고 있었지만 사회적인 관심이 모아지지는 않았다. 학생들이나 교직원들도 내 놓고 이야기는 못해도 당연히 제대로 이끌어 갈 새 주인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돈 많은 기업이 인수해서 투자 한다면 하는 바람은 기업이나 학교나 다를 바 없다.

당시 근무하던 회사는 기업인수를 많이 해서 재계에서는 이미 짜하게 알려져 있었다. 동시 다발적으로 여러 프로젝트들을 진행하기도 했는데, 학교와 관련해서는 단 한번도 거론된 적이 없었기에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어느 날 한 여대생 기자로부터 취재 전화를 받았다.

“저희 학교법인 인수 후보자가 되셨다고 들었습니다. 취재차 몇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예? 여기는 학생이 궁금해 할 만한 내용이 없어요. 전화를 잘 못 한 거 같습니다.”

그러잖아도 복잡한 일이 많았는데, 전화를 건 학생의 말을 제대로 들을 생각도 않고 끊으려 했다. 당연히 잘 못 전화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놀라운 얘기를 듣게 되었다.

“K대학 학교법인을 귀사에서 인수하고자 참여하셨고, 이번에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이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대학생이 ‘우선협상대상자’ 같은 용어를 입에 올릴 일은 없었기에 순간 이게 무슨 얘기란 말인가, 처음에는 귀를 의심했다. 기업 인수합병도 모자라서 이젠 학교법인까지 인수한다는 말인가 하는 생각이었다. 오랫동안 커뮤니케이션 일을 한 경험에 비춰 볼 때 섣불리 한 마디라도 했다가는 큰 문제로 직결될 수 있겠다고 직감했다.

“제가 잘 알지 못하는 부분이라, 좀 더 확인이 필요할 거 같습니다.”

이름 연락처를 챙긴 뒤 전화를 끝내고 사내 여기 저기 헤집고 다녔다. 재무, 법무, 기획 등등 그 결과 찔끔찔끔 조각 정보들을 모을 수 있었다. 내용은 오너 가족이 본인의 사재를 활용하여 학원 인수를 생각했고, 아마도 제출한 입찰 금액이 가장 컸던지 우선협상 대상자로 지정되었는데, 회사가 학교를 인수하는 것으로 알려진 것이었다.

기업 인수 많이 하고 돈 많은 회사로 알려져 있어서 학생들과 교직원들에게는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지만, 회사 입장에서는 난감 그 자체였다. 기성 언론에 알려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심각한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여론의 속성상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 뻔했다. 거기다 수 많은 학생들과 교직원들 간의 자가발전은 전혀 예상치 못한 또 다른 문제를 낳을 수도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임원 몇몇을 더 만나 얘기 들은 결론은 입찰에 참여는 했으나, 여력이 충분하지 않아, 제대로 진행될 지 불투명하다는 것이었다. 회사도 다른 이슈들이 많아서 지원할 수 없었기에 공론화 되어서는 절대 안 되고, 조용히 넘어가는 것이 상책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입장 바꿔 생각해보면 돈 많은 기업이 학교 재단을 인수하게 되었다는 것은 학교 정상화를 넘어서 투자와 발전이라는 희망을 주는 소식이다. 당사자인 학생들과 교직원들에게는 얼마나 기다리던 소식이었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학교에서는 가장 큰 이슈가 되는 것이어서, 학생 신분의 기자라도 회사에 취재하는 것은 당연했다.

앉아서 전화가 또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수 없었다. 득달같이 택시를 타고 무작정 K대학으로 향했다. K대학 이름을 들어보긴 했어도 위치는 알지도 못했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도착했고 학보사가 있을만한 학생회관 쪽으로 향했다. 가면서 그 취재 기자에게 전화를 했다. 직접 만나고 싶어 학교로 왔으니 잠깐 만나자고 청했다. 전화기 너머로 학생은 당황한 눈치가 역력했다.

 

학보사도 신문사, 학생 기자도 기자

확인 후에 연락 하기로 했는데, 불쑥 학교까지 한달음에 쫓아 와 만나자고 하는 것 자체가 좀 오바인 듯 느껴질 만도 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학생회관 앞 벤치에 앉아 ‘대규모 자금이 동원되는 기업인수는 물론 학원의 인수에서도 딜이라는 것이 얼마나 복잡하고 예민한 문제인지’ 그리고 ‘이런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하는 회사의 민감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을 설명했다. 이제 대학교 2학년인 여학생이 M&A와 관련해 알아 듣기 쉽도록 설명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자초지종 들은 뒤, 그 학생은 나의 입장을 받아들였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학보사 선배 기자들이 있고, 편집국장과 간사선생까지 만나서 해결 해야 할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나 역시 대학교 영자신문사에서 3년 동안 수습기자부터 편집국장 생활까지 겪어본 터였기에 학생기자의 생리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간사님은 30분쯤 뒤에 학보사 사무실에서 만날 수 있는데, 편집국장님은 수업 중이라 아마 한 두 시간 기다려야 합니다.”

그 기자는 다른 취재가 있고 수업도 가야 한다며 자리를 떴다. 전화로 말은 전했으니 직접 만나 해결하라고 하고, 3층에 편집국이 있다는 말만 남기고 사라졌다. 학생회관 주위를 배회하면서 자판기에서 뽑은 커피를 마시면서 학생들이 공을 차는 운동장, 삼삼오오 분주히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감상했다. 햇살 포근한 가을 오후 캠퍼스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샐러리맨의 모습은 그들과 다른 세상 사람인 듯 느껴졌다.

편집국에서 여학생 편집국장, 그리고 간사 선생과의 장황한 대화가 이어졌다. 이런 기쁜 소식을 빨리 전하고 싶어하는 두 사람과 노출 되어선 곤란한 회사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그 주의 후반이었던 지라 급하게 탑 기사를 대체할 마땅한 것이 없다는 것도 그들의 또 다른 입장이었다. 학생과 교직원들이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소식을 내보내지 말아 달라고 하는 기업의 입장을 납득시키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정 어려우시면, 한 두 주 정도 뒤에 내시면 어떻겠습니까?”

기성언론사 기자들에게 하는 말투 그대로 그야말로 간청을 했다. 그렇게 어렵사리 간사까지 이해를 시켰다.

“저희로서는 납득이 잘 되지 않지만, 큰 규모의 자금이 오가는 일이고, 그룹 팀장님이 직접 방문했다는 것만 해도 보통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편집회의를 다시 열어서 뉴스 게재를 한 두주 정도 뒤로 밀겠습니다.”

덩치는 작았지만 편집국장은 의외로 딱 부러진 성격이었다. 겨우 수습한 뒤에 가지고 갔던 간단한 기념품 몇 개를 담은 쇼핑백을 전달하고 나왔다. 그렇게 상황을 종결 짓고 택시로 복귀하면서 회사에 알렸다.

“온갖 신문사 기사를 막다 못해 이젠 학보사까지 막으러 다니는구먼.”

재경담당 임원과 옆 부서 팀장들이 대견하다는 뜻을 담아 살짝 농담조로 말을 건네왔다.

“학보사라고 무시하면 안 됩니다. 대학 학보도 국회도서관, 전국의 다른 대학교나 공공기관으로 배포되기도 합니다. 또 아는 사람들에게 보내기도 하기 때문에 어디서 뭐가 터질 지 모르잖습니까? 하하”

또 한 건 그렇게 처리했다. 학보에 실린 기사가 제도권으로 퍼질 수도 있기에 사전에 틀어막아야 하는 커뮤니케이터로서의 생각은 당연했다. 한 주 또는 두 주 정도 연기됐던 기사는 끝내 게재되지 못했다. 인수작업은 그렇게 말만 있다가 실행되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기사를 막았던 것은 다른 오해를 불러오는 불상사를 미연에 막은 셈이었다. 의외로 기업의 입장을 이해해준 학생들이 고맙다. 아마 그 학생들이 지금은 사회인이 되어 있을 것이니, 그때 내 심정을 더 이해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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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커뮤니케이터, 프로든 아마추어든 상대를 가리지 말고 최선을 다하라.

2. 상대를 무시하고 대충 말하면 결국 상대는 대충 이해할 수 밖에 없다.

3. 긴장을 늦추지 마라. 아마추어 언론에서 여론이 촉발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