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밤에 충분히 잠을 청해도 낮에 끊임없이 졸음이 온다면 단순 피로가 아니라 '기면증'일 수 있다. 기면증은 주간 졸음, 전신에 기운이 빠지는 탈력발작 등을 특징으로 하는 희귀난치성 질환이다. 기면증을 치료하는 약물과 일상적인 방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사진=이미지투데이

해가 중천에 뜬 대낮, 뻥 뚫린 도로 위를 걷다가 갑자기 쓰려져 그대로 잠이 드는 한 청년. 영화 ‘내 마음의 고향 아이다호(My Own Private Idaho, 1991)'의 한 장면이다.

배우 리버 피닉스는 극중에서 기면병(Narcolepsy)을 앓아 마치 발작을 일으키듯 순식간에 잠에 빠져드는 소년인 마이크 워터스를 연기했다.

영화나 드라마 등 디지털 매체에서 다뤄지는 기면증은 차가 다니는 도로 위에서도 잠에 빠질 정도로 극단적인 증상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 볼 수 있는 기면증 환자는 ‘보통 사람보다 잠이 지나치게 많거나 게으른 정도’로 질환을 앓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고대안암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조철현 교수는 "과도한 주간 졸림증은 가볍게는 지속되는 낮동안의 졸림과 심할 경우에는 수면발작의 양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며 "정말 심한 경우에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저항할 수 없는 수면발작을 호소하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밤에 많이 자도 낮에 졸리면 의심

기면증의 가장 큰 특징은 밤에 잠을 자도 낮에 심한 졸림을 호소하는 주간졸림증이다. 이밖에 탈력발작, 가위눌림, 입면 시 환각, 수면 곤란 등의 증상도 보인다.

탈력발작(cataplexy)은 크게 웃거나 화를 낼 때 골격근의 힘이 갑자기 빠지는 현상이다. 스트레스, 식사, 피로도 탈력발작을 유발할 수 있다. 기면증 환자의 약 70%에게서 나타난다.

수면마비(sleep paralysis)는 잠에 들거나 잠에서 깰 때 의식은 깨어 있는데 의지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근육인 수의근이 잠시 마비되는 현상이다. 기면증 환자의 약 40%가 호소한다.

입면환각(hypnogogic hallucination)은 잠에 들거나 잠에서 깰 때 환각을 느껴 잠을 깬 후에도 꿈이 지속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증상이다.

유병률 0.2% 미만, 희귀질환 지정…원인 명확하지 않아

기면증의 유병률은 0.002~0.18%로 알려져 있으며 2009년 보건복지부에 의해 희귀난치성질환으로 지정됐다. 남녀 비슷하게 발병하고 발병률은 사춘기와 30대에 가장 높다.

원인은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HLA DQB1 0602 유전자 및 수면·각성의 조절에 관여하는 신경전달물질인 히포크레틴(hypocretin)의 농도 저하 등이 관련된 것으로 전해진다.

한국인 기면증 환자 중 92.4%에서 HLA-DQB1 0602 대립유전자가 관찰되고 91.7%에서 뇌척수액내 히포크레틴 농도가 저하돼 있는 것이 한 연구에 의해 보고됐다.

기면증 1차 치료제 ‘모다피닐’, 새로 들어온 ‘아모다피닐’

기면증 환자에 주로 처방되는 약물은 각성을 일으키는 중추신경계용 약으로 ▲모다피닐(Modafinil) ▲암페타민(amphetamine) ▲메틸페니데이트(methylphenidate) ▲페몰린(pemoline) 등이 있다.

모다피닐(modafinil)은 과거에 사용하던 메틸페니데이트(methylphenidate) 등의 도파민계 약물과 효과면에선 유사하면서 내성과 의존성이 비교적 적어 일차적인 치료제로 사용되고 있다.

원개발사는 미국계 제약사인 세팔론(Cephalon)으로 JW중외제약은 모다피닐 성분의 수면장애 블록버스터 약물 ‘프로비질(Provigil)’을 2002년부터 수입해 판매해오고 있다. 제네릭(복제약)으로 JW신약이 만들고 2013년 허가를 취득한 ‘제이모다정’이 있다.

새로 국내에 수입된 약으로는 아모다피닐 성분의 누비질(Nuvigil)이다. 프로비질과 마찬가지로 세팔론社가 개발했으며 테바는 2011년 세팔론을 인수해 누비질에 대한 권리를 획득했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지난 4일 누비질의 국내 시판을 허가했다. 한독테바가 국내 판매권자가 된다. 테바에 세팔론이 인수됐지만 한국 내에서 프로비질의 판매는 그대로 JW중외제약이 맡는다.

프로비질과 누비질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누비질은 프로비질의 후속약으로 프로비질의 화학적 이성질체(異性質體)다. 분자식은 같지만 서로 다른 화학적 성질을 갖는다는 뜻이다.

쉽게 예를 들면 해열진통제로 잘 알려진 이부브로펜의 이성질체로 덱시부브로펜이 있는데 덱시부브로펜은 이부브로펜에서 효능을 나타내는 S-이부브로펜 성분을 뽑아 만든 것으로 이부브로펜보다 적은 용량으로 동일한 효과를 낼 수 있다.

한독테바 관계자는 “테바는 기본적으로 환자 수는 얼마 없어도 환자들이 고통받는 약을 주로 개발하고 있다”며 “누비질이 꼭 프로비질보다 우월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누비질이 프로비질보다 적은 용량으로도 긴 시간 효과를 유지할 수 있는 것으로 확인된 만큼 기면증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에게 또 다른 치료옵션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일상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기면증 관리법: 수면조절 

약물치료 외에도 주간 졸음을 조절할 수 있는 수면조절을 병행하는 것이 좋다. 기면증 환자는 주간 졸음을 심하게 호소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졸음이 해소되지 않을 경우 운전 중 사고 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 아침에 기상한 후 5시간 간격으로 10~20분 정도의 낮잠을 자는 것이 좋다.

정기적인 취침시간을 유지해야 한다. 매일 같은 시간에 잠자리에 들고 일어나고 주말에도 되도록 해당 패턴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

자기 전엔 컴퓨터와 TV, 스마트폰 사용을 하지 않아야 한다. 특히 스마트폰의 블루라이트는 뇌의 시신경을 자극해 수면을 방해한다.

아주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정영기 교수는 "기면증 환자는 생활 스케줄을 병에 맞춰 조절할 필요가 있다"며 "오후에 증상이 있는 환자는 낮잠을 규칙적으로 자는 것이 좋고 직업 선택에서도 운전이나 기계조작을 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피해야 할 음식

잠들기 전 술을 마시는 것은 피해야 한다. 일이 끝난 뒤 맥주 한 캔을 마시면 순간적으로 몸이 이완되면서 나른한 잠이 쏟아지지만 방광이 자극돼 오히려 한밤중에 잠에서 깰 수도 있다.

기면증 환자는 식사 후 특히 졸음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많은 양의 탄수화물을 섭취하면 이러한 증상이 심해지므로 섭취하는 탄수화물의 양을 줄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커피 등에 들어있는 카페인 섭취는 일반인에는 일부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기면증 환자에겐 권고되지 않는다.

조철현 교수는 "기본적으로 기면증에서 카페인 섭취보다 기면증에 필수적인 약물 투약을 권고한다"며 "일반인에게서 나타나는 주간 졸림증에 대해서 카페인 섭취가 일부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카페인은 아데노신을 길항함으로써 중추신경자극제로 작용해 졸림을 극복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긴 하지만 주간 졸림증을 호소한다면 카페인의 섭취보다 야간 수면의 개선, 일주기 리듬의 관리 등을 우선적으로 권고한다"고 덧붙였다.

정영기 교수도 "카페인 섭취가 주간 졸림증 등 기면증 증상 개선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주간졸림증’ 자가 진단 해보세요!

수면 전문가에 의해 시행되는 진단 검사로는 수면다원검사(polysomnography)와 수면잠복기반복검사(multiple sleep latency test, MSLT)가 있다.

집에서 자가진단을 해볼 수 있는 검사로는 만성적인 주간졸림증과 단순한 낮잠을 구별하는 엡워스(Epworth) 척도가 있다. 총 8개 질문 항목에 항목별 0~3점을 주는데 합계 점수가 10점 이상이면 주간졸림증을 의심할 수 있다.

▲ 엡워스 주간졸림증 척도(Epworth sleepiness scale, 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