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무, 180×255㎝ 화선지에 수간채색, 1974

 

-전문-

[나의그림 나의자취]편은 이정연 작가의 1974~1994년까지 약 20년 간 발자취를 기록, 정리한 내용이다. 작가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를 졸업한 해가 1975년도이다. 이후 1988년 미국 뉴욕 프랫대학원에서 서양화와 판화를 전공하고 1993년 콜롬비아대학교 사범대학에서 미술교육을 전공하고 귀국한 시기와 맞물려 있다. 이정연(ARTIST RHEE JEONG YOEN)작가에게는 이 시기가 청춘의 황금기이기도 하였지만 작가로서의 열정과 생의 열망이 타올랐던 주요한 시기이다. [나의그림 나의자취]로 구성한 내용모두 이정연 작가의 글임을 밝힌다.<편집자 주>

어머니라는 존재는 대부분 누구에게나 영원한 그리움과 안식처로 다가온다. 오랫동안 당뇨로 시달리시다 대학교 2학년 때 외롭게 이 세상을 떠나셨다. 유난히 꽃을 사랑하셨고 동물들을 사랑하셨던 따스하시고 속이 깊어 치마만 둘렀지 남자 같다던, 시골에서 큰 사업을 하셨지만 얼굴이 희셨던 어머니! 덕분에 나는 흙을 사랑하고 풀냄새 풀벌레소리 동물들과 대화를 나누며 꽃 속에 파묻혀 막내로써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랄 수 있었다.

나는 깨진 병들을 주워 밑에 꽃과 풀, 메뚜기, 잠자리, 매미껍질, 병마개, 병에 붙여 있던 예쁜 레벨 등을 조합해 정신없이 마당에 설치 미술을 했고 매일 무엇인가를 그렸다. 사무실에서 사람들이 오면 그 사람 얼굴을 똑같이 그렸다고 칭찬도 받고 했던 기억이 난다. 요사이도 나무들의 움직임, 구름의 흘러가는 것을 보면 어릴 때 많은 상상의 나래를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펼치곤 했던 그 시절이 생생히 떠오르곤 한다.

지금 되돌아보면 얼마나 많은 축복된 시간이었나. 이렇듯 내가 자연을 사랑하고 흩날리는 바람 속 흔들리는 잎사귀들을 보며 한없는 평화와 안식과 신의 위대하신 축복을 가슴깊이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 소아마비였기에 나는 집에서 지내며 꽃과 동물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나에게는 큰 산과 같은 존재였던 어머니가 떠나신 후 얼마 안 되어 나를 가장 아껴주시고 키워주셨던 외할머니-나에게 글씨 쓰는 법, 절하는 법부터 엄격한 예절 등 하나에서 열까지 사랑으로 돌보아주셨던 분이 돌아가셨다.

큰 충격 속에 인생의 허무함이 덮치며 끝없는 방황과 외로움 그리고 어두움 속에 깊이 파묻혀 학교에도 별로 관심이 없고 절망될 때 다행히 어릴 때부터 벗이 되어주던 나무 곁에 앉아 혼자말로 중얼거리고 자연을 벗 삼아 위로를 받곤 했다. 서울대 미대에 입학해서 데모로 2년은 거의 휴학상태였고 모든 의욕을 잃었던 나는 교실에 빠지는 일이 많아 결국 내 자리까지 없어지는 상황까지 가는 지경이 되었다. 중고등학교시절 나는 엄마에게 기대 받는 딸이었다.

소아마비로 몸이 약해 초등학교시절 거의 학교수업도 못 받았지만 공부는 어느 정도 해서 의대를 가서 나같이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꿈이 있었다. 그러다 고2때 나중에 서울미대 조소과를 간 친구를 따라 그림 배우는 아틀리에를 놀러갔었는데 거기서 서울 미대졸업반이셨던 진영선 언니를 만났고 그로인해 나는 화가의 길로 진로를 바꾸었다.

기대를 저버려 어머니를 울린 막내딸의 변심으로 나는 항상 어머니에게 죄지은 듯 한 죄송함을 지녔고 대학4년 때 마음을 다잡고 졸업 작품을 했다. 회화과로 들어가서 대학교 3학년 때 서양화, 동양화로 나누게 되었는데 우리의 전통을 알고 싶어 동양화를 전공으로 택하였다.

졸업 전(展) 때 무었을 그릴까 고민하다 고전무용을 그리고픈 마음에 내가 살던 아파트 옆 동(洞)에 한국무용을 전문으로 하시는 선생님이 계신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분을 통해 손의 동작부터 추임새까지 하나 하나 직접 배우며 3개월간 후학들의 춤추는 모습을 틈틈이 스케치하여 작품으로 완성했다. 인체크기와 거의 비슷하게 그렸던 작품이다. 대학에서 처음으로 몰래 경비를 피해 밤을 새우며 작업에 매진했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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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동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