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대한제국의 역사서를 강제로 압수해 가고 점제현 신사비까지 옮겨가며 왜곡하려 해도, 왜곡할 수 없는 것이 역사라는 진실이다.

고조선에 관해서는 우리 역사책이 아닌 중국역사책에도 아주 잘 기록되어 있다. 중국역사책인 <산해경광주>에 보면 “요(堯) 임금때인 무진년(BC2,333년)에 신인이 태백산 단목(檀木) 아래로 내려오니 조선인이 그를 임금으로 모시고 단군이라 칭했다. 한(漢) 시기의 낙랑군이 그곳이다.”라고 나온다. 단군이 조선의 임금인 것을 명시함과 동시에, 한 시기의 낙랑군이 단군이 다스리던 조선에 설치되었다는 거다. 이런 기록을 접한 일제는 낙랑의 위치를 바꾸기 위해서 난하 옆 갈석산에 자리 잡고 있던 점제현 신사비를 평양 근처인 온천으로 옮기면서까지 고조선을 반도 안에 집어넣으려고 역사를 왜곡했던 것이다.

정리해서 하자면 고조선은 난하를 국경으로 중국의 연・진・한나라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던 나라다. 물론 낙랑도 그곳에 있었고 고구려도 그곳까지 영역을 넓히고 있었다는 것이 이 비석 하나로 결론이 나는 것이다. 그 증거로 지금 난하 동쪽에 있는 요하 유역에서 고조선 유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일제가 고조선과 낙랑은 물론 고구려까지 반도 안으로 집어넣기 위해 역사를 조작했지만 역사는 인위적으로 조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제가 이렇게 전력을 다해서 대한민국의 역사를 왜곡한 덕을 가장 크게 보는 것은 역시 중국이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병탄하고 자손만대 지배하겠다는 목적으로 역사를 왜곡해서 대한제국의 역사를 반도 안으로 집어넣었다. 하지만 제 2차 세계대전의 패전과 함께 36년 만에 대한제국은 독립을 한다. 결국 중국은 일제가 왜곡해 준 역사 덕분에 손쉽게 만주를 자신들의 손아귀에 넣을 수 있었다.

만주는 대한민국의 영토임이 분명하지만 당시 대한민국은 일본의 식민지에서 독립을 하는 처지였다. 그것도 자력이 아닌 미・영・소・중이라는 소위 연합국 덕분에 독립을 하는 처지였다. 당연히 대한민국의 영토가 어디부터 어디까지라고 주장할 처지가 못 되었다. 하지만 중국은 위상이 달랐다. 한때는 일본에게 절절매는 신세였지만, 일본이 미국을 선제공격해 준 덕분에 연합국의 아시아 대표 역할을 했다. 그 덕분에 1932년에 일제가 대륙정벌이라는 허황된 꿈을 현실화 시키겠노라고, 청나라 마지막 황제 애신각라 부의(愛新覺羅溥儀 : 아이신기오로 푸이)를 내세워 건국했던 만주국의 해체에 따른 만주국영토귀속에 깊숙이 관여 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결국 만주국영토를 중국에 귀속시키고 만 것이다.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그 어느 것을 보아도 대한민국에 귀속되는 것이 당연한 만주를, 중국은 그런 과정을 통해서 강점해 놓고는 자신들의 영토라고 공공연히 떠들고 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 되는 바람에 엉겁결에 만주를 차지하였지만, 만주의 진정한 주인이 아닌 까닭에 만주의 확실한 역사를 모르는 중국은 일제가 고조선 역사를 왜곡한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였다. 오로지 고구려 역사만 자신들의 역사로 만들면 만주가 자신들의 차지가 되는 것으로 알고 고구려 역사 왜곡에 매진하여 동북공정에 열을 올리며 설치는 동안 요하주변에서 자신들도 모르는 유물이 쏟아져 나온다. 바로 고조선 유물들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5,000년 전 고조선 유물들을 맞닥뜨리자 중국은 부랴부랴 자신들의 역사는 이미 5천 년 전이며, 자신들의 문화 발상지는 황화가 아니라 요하라고 하면서 요하문명론을 내세워 영토공정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국이 아무리 역사를 왜곡하고 싶어도 역사는 변하지 않고 밝혀지게 되어있다. 특히 만주의 경우에는 다량으로 분포되어 있는 고조선 유물 때문에 꼼짝도 할 수 없다. 만주에서 발굴되는 고조선 유물들이 어느 곳의 유물들과 일치하느냐가 같은 문화권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판가름 해 주는 까닭이다. 고조선의 대표적 유물인 고인돌과 비파형 동검만 가지고도 만주가 대한민국과 동일한 문화를 누리던 곳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북한학자 박진욱이 쓴 “비파형단검문화의 발원지와 창조자에 대하여”라는 논문에 고인돌과 비파형 동검의 분포지역에 대하여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