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인에게 사인을 받아봤다. 딱 한 번이다. 인도인이 ‘시대의 위인’으로 추앙하는 압둘 깔람의 사인이다. 2014년 델리로 가는 인도 국내선 안에서 앞좌석에 앉은 그를 보고 경호원을 통해 사인을 요청했더니 흔쾌히 필자의 명함에 사인을 해주었다. 어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인도의 우주과학 발전과 탄도미사일 개발에 큰 업적을 세운 과학자 출신으로 야당과 여당 모두의 지지를 받으며 11대 대통령으로 추대받았다. 독신이었던 그는 2015년 작고했을 때 단 두 켤레의 구두만 남겼을 정도로 평생을 청렴 소박하게 살았다. 대통령 퇴임 이후 경호원 한 명만을 데리고 일반석에서 여행하던 그를 필자가 우연히 만났던 것이다.

‘깨달음’이라는 정신세계를 강조하는 인도의 이미지와 잘 부합되는 그가 인도인의 숭앙을 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사회로 나가는 인도 젊은이에게 회자되는 그의 어록은 정신적이면서 미래가치를 고양하는 내용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적인 개인본위 의식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 “회사나 고객이 결코 네 수고에 감동하지 않으니 규정시간 외까지 일하지 말라”, “네가 곤경에 빠졌을 때 결코 회사가 손 내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하라”는 어록에 어리둥절하게 된다. 압둘 깔람 자신의 삶은 정신가치를 우선한 청렴과 성실로 관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도 젊은이들에게는 자신과 가족의 행복추구를 먼저 하라는 식의 개인본위에서 세상을 대하는 것이었다.

정신가치를 찾기 위해 인도로 떠난 바 있다는 비틀즈와 같은 유명인들의 일화를 드물지 않게 접한다. 한국에서도 연예인들이 활동을 중단할 때 인도로 갔다는 기사가 심심찮을 정도로 인도는 정신고양의 본향인양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런 인도의 인도인과 무엇으로든 부딪힌 경험이 있는 이들은 사소한 이익조차 약삭빠른 처신에 혀를 내두르곤 한다. 심지어 수행하는 사도들에게도 이런 면을 본다고 한다. 과연 인도는 멀리서 본 정신가치 성품이 지배하는 국민성이 참 모습인가? 아니면 가까이 접하면 접할수록 느껴지는 물질본위 인성이 진짜인가? 무엇을 택해도 정답이 아니다.

인도의 거리 곳곳에 서 있는 간디는 인도인의 정신적 지주이다. 출처=김응기 

겉포장은 ‘정신가치’이지만 이의 속 포장은 ‘물질가치’이고 그 내용물은 단정할 수 없는 개별적 ‘인간가치’라고 보는 것이 좀 더 정확한 인도와 인도인에 대한 정의이다. 누구를 대할 때, 속 깊은 곳에 있는 ‘인간가치’가 다시 정신가치에 치중된 것인지, 아니면 ‘물질가치’에 치중된 것인지를 알아내기는 어렵지만 여기서 분명한 것은, 겉으로 드러난 정신가치가 본질이 아니고 바로 밑에 있는 물질가치가 인간가치가 드러나기 이전까지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흔히 인도 여행을 하는 동안 가이드와 정이 들어서 이에 후한 사례를 했더니 가이드가 벌써 여러 계산에서 충분히 이득을 취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고 분노하곤 한다. 정을 주고받았다고 생각한 것에 배신감을 느낀 것이다. 몇 년을 성실하게 운전하던 인도인이 한국인 주재원의 귀국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선 급작스럽게 월급인상을 요구하고 이에 주재원이 망설이자 다음날 다른 외국인 가정으로 이직해버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인도에서 한국인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인도인과 업무나 현지 생활에서 정으로 잘 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여기지만, 인도인에게는 단지 급여와 이윤이란 물질가치로 이어가는 거래라 먼저 여겼던 것이고 그 위에 ‘정(情)’이란 교감은 요구르트 위에 얹은 토핑(고명)과도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고명은 있으면 아름답고 맛나지만 요구르트 그 본질 자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물질이란 본질 위에 정신이란 고명을 얹은 인도, 인도인들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이후 비즈니스를 포함한 모든 인도 관계에서 빚어지는 일에 그다지 황망해 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