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신문기자를 ‘볼펜’이라고 불렀다. 볼펜 한 자루와 수첩만 있으면 일할 수 있었다. 기자 대부분은 하루에 기사 몇 꼭지만 썼다. 기자실 한켠에서는 늘 바둑판이 벌어졌다. 이제, 이런 풍경은 까마득한 옛 일이 됐다. 요즘 기자들은 전투병처럼 배낭을 메고 다닌다. 한 손에는 '무전기' 핸드폰을 들고 배낭에는 노트북, 배터리, 핸폰 충전기 등 장비를 채우고 있다. 기자들은 출퇴근시간이  없다. 카톡에 소환되어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종일 기사를 쓰고 쏜다. 지면 뿐 아니라 웹사이트, 모바일 홈페이지,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포털들의 여러 섹션에 기사를 전송한다.

3년 전 <뉴욕타임스>가 선언한 ‘디지털 퍼스트(Digitial First)’ 전략은 이처럼 전 세계 언론의 디지털화를 촉발했다. ‘뉴욕타임스 혁신보고서’에 담긴 디지털 우선주의에는 ‘기사를 온라인에 먼저 공개하고, 종이신문에는 그중 좋은 기사들을 모아서 발행하자’는 내용까지 포함됐다. 당시 한국의 신문사들도 화들짝 놀랐다. 주간지, 월간지 등 모든 종이매체들이 매한가지였을 것이다. 세계 최고의 신문사가 이렇게 나설 정도라면, 더 이상 광고에 의존해선 생존이 어렵겠다는 뒤늦은 자각이 따랐다.

이후 벌어진 상황은 독자들이 목도하고 있다. <뉴욕타임스>의 ‘디지털 퍼스트’는 한국에 와서 ‘트래픽 퍼스트’로 변질됐다. 귤이 회수(淮水)를 건너자 탱자가 된 격이다. 맘 급한 언론사들은 디지털화에 적응 못 하는 기존 오프라인 기자들을 제치고 별도의 온라인 부서를 만들거나 외주업체들과 계약해 온라인용 기사를 생산했다. 온라인용 기사는 클릭을 유발하는 연예, 스포츠, 사건사고, 요리, 동물 등 오로지 흥미롭고 선정적인 연성 기사 위주로 채워졌다.

그 폐해는 생각보다 심각하다. 무엇보다 각 언론사의 정체성이 훼손됐다. 매체 특성은 사라졌고, 기사 품질은 현저히 떨어졌다. 기존의 콘텐츠 제작 프로세스가 약화됐다. 기사의 선정, 취재, 게재 과정에서의 여러 단계에 걸친 검증과 교열, 그리고 의제를 설정하는 고도의 프로세스 등이 거의 무시됐다. 기사를 막 쓰고, 막 내보냈다. 포털에 들어가 보면 지금도 날림기사, 베끼는 기사, 중복기사, 맞춤법과 문장구조가 엉망인 비문(非文)들이 쏟아진다.

너나 할 것없이 거의 모든 언론사들이 조회수, 클릭수, 좋아요 수, 페친수를 높이고 늘리는데 혈안이 되면서 환경 감시, 의제 설정 등 언론의 고유 기능에 충실한 심도 있는 기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특종경쟁도 잊혀졌다.

이 와중에, 올해 1월 <뉴욕타임스>가 ‘2020 보고서’를 냈다. ‘디지털 퍼스트’ 선언 이후 3년 만이다. 이 보고서에는 ‘독보적 언론(Journalism that Stands Apart)’ 전략이 집중 소개됐다. 보고서의 핵심대목은 다음과 같다. “우리의 최우선 순위는 <뉴욕타임스>를 차별화해주는 고품질의 강력한 뉴스 수집 활동을 유지하면서 회사가 성장하도록 해주는 것입니다(Our priority is to maintain the high-quality and robust news-gathering operation that sets our Company apart, while at the same time positioning our organization for growth).”

<뉴욕타임스>의 ‘독보적 언론’ 전략이 소개되자 일부에서는 ‘병 주고 약 준다’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디지털 퍼스트’ 전략의 부작용이 드러나자 뒤늦게 ‘퀄리티 퍼스트’로 말을 바꿨다는 불만이다.

하지만, 이것은 큰 오해다. <뉴욕타임스>는 디지털 채널들의 특성에 맞춰 콘텐츠 형식을 다양하게 변경하더라도 그 품질만큼은 양보한 적이 없다. 실제로 디지털 퍼스트의 목표는 유료독자 확보였다. 유료독자는 품질이 보장되지 않고서는 확보할 수 없다. 그 결과 <뉴욕타임스>의 2015년도 유료구독 수익(8억5000만달러)은 광고 수익(6억4000만달러)을 크게 앞질렀다. 디지털 매체에 대한 유료구독이 크게 증가한 덕분이었다. 디지털퍼스트 전략을 성공적으로 수행해온 <뉴욕타임스>가 올해 ‘독보적 언론’ 전략을 내놓은 것은 디지털 퍼스트 시대에서도 창간 이래 추구해온 차별성이 희석되지 않도록 다시 한 번 주의를 환기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물론 한국에서는 디지탈 매체에 대한 유료구독이 쉽지 않다. 여러 언론사가 시도했지만 무위에 그쳤다. 한국의 독자들이 온라인 뉴스 무료에 익숙한 탓이기도 하다. 그렇더라도, 품질을 외면한 채 트래픽에 매달리는 한국식 디지털 퍼스트 전략으로는 독자 이탈, 매체 신뢰도 하락으로 매출도, 회사 가치도 떨어지는 악순환을 피하기 힘들다.

이럴수록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각 언론의 차별성·정체성을 만들어준 기존 제작 프로세스를 유지하고, 온‧오프라인에 두루 능숙한 멀티플레이어 기자를 양성하며, 타깃 분야에 대한 기사 품질을 더욱 강화하여 타깃 고객을 더 확보하려는 정공법이 맞다. 해법은 기본을 심화하는 속에서 나온다. 이는 <뉴욕타임스>의 ‘독보적 언론’ 전략이 지향하는 방향이기도 하다.

디지털은 종이신문처럼 또 하나의 ‘채널’이다. '본질'을 도외시한 채 '수단'만으로 작금의 ‘고난의 행군’에서 살아남기는 어렵다. <슬램덩크> 강백호의 말마따나 “왼손은 거들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