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번 국도를 달리다 관산동 고양외고 옆길로 들어가면 뒤편 야산에 특이한 집이 한 채 나온다. 청주한씨 문양공파 종갓집이다. 사당과 나란히 있는 종갓집이다 보니 숙연한 마음에 옷깃을 여미게 된다. 서양화가 최구자(Choi, Goo-Ja)는 바로 이 댁을 지키는 종부이다.
작업실이 지하층에 있다. 이도 조상님 사당 높이보다 높아지는 것이 불효, 불경일 것 같아서 2층을 못 올렸다는 것이다. 종부의 삶이 어떤 것인지 대략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이런 환경에서 그림이 그려진다. ‘그린다’는 것, 그것은 작가에게 어떤 의미와 의의가 있는 것일까.
최구자(崔久子, CHOI GOO JA)작가는 초기 녹녹치 않은 종부 생활 중에도 틈틈이 작업을 해서 그룹활동은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분량은 아니었다 해도, 그가 처한 현실을 감안하며 충분히 善防했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작가의 욕구와 열망은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30년 넘는 세월동안 ‘벼르고 혹은 벼려온’ 내면이 어지 筆舌로 다 형언될 수 있겠는가. 耳順에 즈음해서야 畵業에 본격적으로 투신하게 된다. ‘운명적’이라는 것은 미술대학을 나왔다는 사실이 아니라, 진정 ‘끼’와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일컫는 말이리라.
정말이지 작가의 그림은 오랜 세월 치열하게 살아온 삶의 地層에서 얻어진 광물적 결정체와도 같은 것이다. 삶 치고 한 편의 드라마 아닌 것이 없다지만, 묵묵히 반세기 가까운 세월 속에서 ‘벼르고 벼르온’ 美意識세계가 그리 간단하겠는가.
작가의 화면에 ‘새’ 이미지가 많이 등장하던 때가 있었다. 반추상 작업이 한창하던 때의 화면에서 새는 작품의 결정적 키가 되고 있었다. 굳이 작가의 심경과 결부시키지 않더라도 독해될 수 있는 문맥이기는 하나, 작가의 삶이 대입되지 않았더라면 화면의 主役으로까지 읽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글=이재언(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