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 씨는 로맨스 영화를 즐겨보는 편이다. 그런데 요즘은 통 이런 장르의 영화를 찾아보기 힘들다. 제작 자체가 잘 안 되기도 하지만 가끔 나오는 이런 장르의 영화가 왠지 성에 차지 않는다. 생각해보니 요즘 너무도 재미있는 TV 드라마가 많아서인 것 같기도 하다. M 씨는 한동안 <태양의 후예>에 푹 빠져 지내다 얼마 전엔 <도깨비>로 홍역을 치렀다. 웬만한 로맨스 영화가 좀 시시해 보이는 것이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요즘은 과거에 나왔던 명작 로맨스 영화 재개봉 열풍이 일어나며 이런 아쉬운 마음을 조금은 채울 수 있다.

국내 영화시장에서는 언젠가부터 잘 되는 영화와 안 되는 영화 장르가 뚜렷이 나뉜다. 전반적으로 흥행 성공률이 높은 영화 장르로는 액션, SF, 범죄물 등을 들 수 있다. 반면 한때 주류였던 드라마나 로맨스 장르 영화는 상대적으로 관심도가 떨어진다. 원인을 다양한 곳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영화관이 아니더라도 영화를 볼 수 있는 길이 많아졌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가정에서는 VOD 서비스를 넘어 IPTV가 대중화된 지 오래고, 심지어는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며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즐긴다. 그런데 관객들 사이에서 드라마나 로맨스 장르는 TV나 스마트폰으로 봐도 충분하다는 인식이 많다. 여기에다 TV에서 방영하는 드라마의 수준이 높아졌다. <도깨비> 16부작에서 즐겼던 알콩달콩 로맨스를 2시간 영화 한 편에서 느끼기는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굳이 영화관에서 돈을 내고 드라마나 로맨스 영화를 보려 하지 않는 것이다. 반면 액션, SF, 범죄물 등은 다르다. TV나 스마트폰으로는 화려한 장면과 사운드를 오롯이 즐기기 어렵다. 이런 영화들은 영화관에서 좀 더 큰 화면으로 봐야만 충분히 몰입할 수 있다는 것이 관객들의 생각이다.

관객이 찾는 영화를 편성해야 하는 영화관 입장에서도 이런 흥행성 높은 영화에 대한 비중을 높이게 된다. 그러다 보니 영화계 내에서 쏠림 현상을 지적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영화관이 지나치게 상업성 위주로 영화를 편성하다 보니 영화시장의 다양성을 헤친다는 지적이다. 제작자나 감독들 역시 돈 되는 상업 장르에만 매달리고, 작가주의적 도전의식이 사라지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하지만 최근 흐름을 보면 이런 걱정은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2016년 여름을 뜨겁게 달군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 무려 1156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2016년 유일한 천만 영화로 기록됐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영화의 소재는 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낯선 ‘좀비’다. 국내에서도 할리우드 좀비물이 종종 개봉하긴 했지만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달리는 KTX 안에서 좀비와의 사투를 다룬 <부산행>은 흥행 측면에서 보면 애당초 큰 모험이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약점을 딛고 <부산행>은 보기 좋게 홈런을 날렸다. 비주류가 주류로 화려하게 등장한 순간이었다.

이런 현상은 다른 영화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나홍진 감독의 <곡성>의 경우 국내에서 보기 드문 낯선 장르의 공포물이다. 공포물 하면 떠오르는 학원 공포물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도전적 작품이다. 그런데도 거의 700만명에 가까운 고객을 극장으로 끌어냈다. <아가씨>는 어떤가? 박찬욱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는 일반 시대극의 패턴에서 크게 벗어나 동성애 코드를 넣었다. 유교 문화가 지배하는 우리나라에서 동성애 영화는 대체로 큰 환영을 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이 영화 역시 400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영화 반열에 올랐다. <귀향>은 유명 배우가 등장하지 않는 독립영화 성격을 띠면서도 350만명이 넘는 관객을 모았고, <너의 이름은>은 관객층이 옅은 일본 애니메이션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역시 350만명의 관객과 호흡했다.

결국 상업영화라는 큰 틀 내에서도 감독들의 창조적 영감들이 담겨 새로운 다양성을 만들어내고 있다. 몇 가지 장르가 결합되며 상당히 실험적인 상업영화가 등장하는가 하면, 독립영화 감독들이 상업영화 시장에 진출해 자신의 개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영화시장에 새로운 활력소가 된다. 이는 결국 한편의 장르 영화가 성공하면 아류작들이 뒤를 잇는다는 전통적 상업영화 시장의 흐름을 바꿔놓고 있다. 조폭 관련 영화가 성공하면 또 다른 조폭영화들이, 시대극 한 편이 성공하면 또 다른 시대극들이 줄줄이 제작되는 그런 현상들 말이다. 이런 현상은 지나치게 상업영화 위주로 흐른다고 비판받던 한국 영화시장 내에서 하나의 흐름으로 형성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사회 곳곳에서 비주류가 주류로 등장하는 시대가 됐다. 상업영화 시장 내에서도 새로운 다양성이 생겨나고 있다. 물론 이런 흐름 뒤에는 수준 높은 우리의 관객이 있다. 변화하는 관객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기적이라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