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여주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허진(48)씨는 최근 신한은행이 시효가 완성된 채권을 소각했다는 기사를 접하고 내심 기대를 잔뜩했다.

"오래된 빚이 있으셨군요?" "아닙니다. 저는 이미 14년 전에 파산신청해서 법원으로부터 면책결정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식당 운영도 잘 되고 별걱정이 없습니다"

면책결정은 파산절차를 거친 채무자에게 빚을 면제해 준다는 법원의 결정이다. 그는 이미 채무가 면제된 상태다. 그가 소멸시효채권을 운운한 것이 의아하다.

면책자 클럽, 회원만 1만2934명

그는 2004년 '면책자 클럽'이라는 인터넷 카페를 개설했다. 면책자 클럽은 파산절차를 거쳐 면책받은 이들이 모인 인터넷 카페다.

이들은 면책자에 대한 은행의 부당한 차별 때문에 모였다. 현재 이 카페 회원 수는 1만2934명이다.

면책자들에 대한 신용정보는 당시 `특수기록(현재는 '공공정보'로 명칭이 변경됐다)` 으로 표시됐다. 특수기록은 채무조정을 거친 금융소비자의 신용정보 분류 중에 하나다.

▲면책자의 신용정보기록. 코드 1201: 파산면책, 코드 1301: 개인회생 코드 1101: 신복위. 자료=면책자 클럽 제공

신용회복지원자, 파산/면책자, 개인회생을 통과한 자들이 그 대상이다. 특수기록자는 카드발급, 대출 등 일체의 여신거래가 가능하지 않다.

이들은 서민금융지원 대상자 범위에도 포함되지 않는다. 파산·면책으로 채무가 없음에도 특수기록자라는 이유로 대출이 안 된다.

인터뷰에 응한 면책자 클럽 허진 대표는 "면책자들은 제도권에서 돈을 융통하면 금방 재기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제도권 금융기관이 이들을 마다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특수기록 등재기간 5년

과거 이들에 대한 이 특수기록은 7년 동안 은행연합회 전산에 등재됐었다. 이 때문에 채무자가 면책을 받은 후에도 7년 동안 여신이 가능하지 않았다.

법원이 정당한 법적판단으로 채무를 면제해도 은행은 이 기록으로 채무자의 경제활동을 제한해 왔다. 면책자 클럽에서 면책자들은 이 기록을 '주홍글씨'라고 말한다.

현행 채무자회생법은 누구든지 파산절차를 거쳤다는 이유로 정당한 사유 없이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않는다고 규정한다.

면책자클럽은 이같은 특수기록 등재기간이 부당하게 길어 면책자의 정상적인 경제생활을 방해한다며 투쟁했다. 그 결과 2009년에 특수기록등재기간은 7년에서 5년으로 줄었다.

특수기록 보다 앞서 신용불량 정보도 골치

면책자들은 특수기록 등재 이전에 '연체정보'를 해제해야 했다. 과거 이 등록코드는 '신용불량 정보'로 분류됐다.

채무자들은 면책 시점에 과거 자신이 빚을 졌던 은행을 상대로 일일이 면책결정문을 우편으로 보낸 뒤, 연체기록의 삭제를 요청했다.

"당시엔 이것이 정말 보통 일이 아니었어요"  김은실 면책자 클럽 운영자는 말했다.

"채무자가 법원에 파산신청할 때, 보통 금융 채권자들이 5군데 이상이에요. 법원에서 면책결정을 받으면 면책자가 면책결정문, 확정문, 채권자목록 이렇게 세트로 각 채권기관마다 보내고 그 채권기관에 담당자에게 전화해서 신용불량기록을 삭제해 달라고 애걸복걸했다니까요"

당시 은행들은 면책자들이 보낸 온 서류를 처리할 부서조차 없었다고 한다.

일부 대부업체는 서류를 보내고 처리결과를 기다리다 못해 전화를 하면, "파산해서 면책 받은 것이 무슨 자랑이라고 서류를 보내고 전화질이냐"며 인격모욕을 당했다는 하소연이 면책자 클럽게시판에 종종 올라왔다고 김 운영자는 말했다.  더러는 이런 모욕적인 발언에 자살하고 싶다는 글도 올라왔다고 그녀는 회상했다.

면책자 클럽은 이 같은 절차가 비효율적이라고 여기고 대법원에 제도개선을 요구했다. 대법원은 이 요구를 받아들여 2005년부터 채무자가 법원으로부터 면책을 받으면 그 사실을 은행연합회에 자동으로 통보했다. 이후 면책자들은 일일이 채권기관에 기록삭제를 요청하지 않게 되었다.

여전히 차별받는 면책자...여전히 차별하는 금융기관

5년이 지나고 특수기록이 삭제되면, 면책자들이 대출이나 카드발급이 가능할까?

허 대표는 2년 전 황당한 경험을 했다. 신한카드가 여주지역 상인들을 대상으로 계열사인 신한카드를 사용하면 5%를 할인해 주는 상품을 소개했다.

허 대표는 파산신청 당시 신한은행과 지금은 신한카드가 인수한 LG카드에 채무가 있었다. 그는 면책 이후에 신한은행은 거래하지 않았다.

허 대표는 이미 면책 된 지 14년이나 되었고 특수기록도 삭제되어 별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고 신한카드 발급 신청했다. 신한카드는 좀처럼 연락이 없었다. 그는 결국 신한카드를 발급받지 못했다.

허 대표는 파산절차를 통해 면책을 받은 후 여주지역에서 꽤 유명한 한식집을 운영해왔다. 그가 운영하는 식당은 여러 방송 매체에서 취재를 했다.

허 대표가 지금 꼭 신용카드가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허 대표는 "특정 카드사의 경우 채무자가 대출금을 갚지 못하고 파산했을 경우, 영원히 `주홍글씨`를 남긴다"며"특수기록이 삭제되었지만, 카드사 자체에 기록으로 남긴다. 금융기관은 법원이 면책이 한 채무자들에 대해 5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차별적으로 신용거래를 제한한다"고 말했다.

그의 말은 카드사가 면책자가 특수기록 등재기간 5년이 지나도 파산, 면책했다는 기록을 남겨 신용상 불이익을  준다는 의미다.

최근 신한은행은 자사가 보유하는 채권중 시효가 완성된 채권을 소각했다. 은행은 ‘소멸시효 포기 특수채권’으로서 이 채권을 소각하고 채무자의 신용거래를 허용하기로 밝힌 바 있다.

업계 1위의 제1금융권이 전향적인 결정을 한 것과 관련, 시민단체와 정치권은 환영의 뜻을 보이기도 했다.

은행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신한은행의 이번 조치가 장기 연체채무자들의 신용개선에 별 도움이 안 되리라는 것이 지배적인 의견이다. 10년 이상 장기연체채무자들은 다중 채무자인 경우가 많다.

신한은행의 소멸시효 포기 특수채권은 채무자들의 입장에서는 여러 채권 중의 일부다. 신한은행의 채권을 소각한다고 해서 이들이 신용거래를 재개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

개인회생 인가자, 체크카드도 이용못해

면책자들의 채무는 법원으로부터 모든 채무를 면책 받는다. 모든 채무가 면제된 이들은 재기 가능성이 매우 높다. 채무가 없기 때문이다. 이들의 특수기록을 소멸시효 특수기록과 달리 취급할 이유가 없다는 지적이 많다.

금융기관의 차별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개인회생은 채무자의 소득과 생활수준을 고려해 최장 5년동안 갚아나가는 변제계획이다. 개인회생 절차상 인가결정이 나면, 비로소 채무자는 본격적인 상환을 시작한다.

이 절차는 최장 5년동안 매달 채무를 갚아야 5년되는 시점에서 채무를 탕감해 준다.  일반적으로 특별한 상환 없이 채무 면제을 받는 파산에 비해 채무상환을 위한 노력이 필요한 절차다.

일부 금융기관은 채무자가 인가결정을 받더라도 체크카드조차 사용하지 못하도록 조치한다. 통장에 있는 만큼 쓰는 체크카드도 마찬가지다. 또 이들에 대해서는 후불 교통카드도 허가되지 않는다.

파산절차를 거쳐 면책을 받는 이들은 체크카드를 사용할 수 있는데 비해, 상환을 위해 노력하는 개인회생 인가자들이 체크카드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게 개인회생 인가자들의 불만이다.

은행권 한 관계자는 "개인회생 인가결정은 상환이 완료된 것이 아니라서 체크카드 신규발급이나 재발급이 가능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파산절차와 개인회생은 채무자의 정상적인 사회복귀를 목적으로 하는 절차다. 채무만 탕감된다고 해서 채무자가 재기할 수 없다.  이들은 위한 금융정책이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