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이름(名)을 가집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오래도록 내려온 ‘약속’이죠. 이름은 인생에 있어 꽤나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평생 들어야 하는 단어일 뿐 아니라, 누군가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이기 때문이죠.

사물도 다르지 않습니다. 특정 제품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스치는 것은 그것의 이름입니다. 물건을 파는 사람들은 상품이나 회사의 이름을 널리 알리기 위해 천문학적인 금액을 투자합니다.

특히 자동차는 식품·의류 등 일반 소비재보다 이름이 미치는 영향이 더 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집 다음으로 비싼 재화인데다, 다른 제품보다 상대적으로 교체 주기가 길기 때문이죠. 현대자동차가 준대형 세단 ‘아슬란’의 이름을 정하는 데 약 1년6개월을 고심했다는 일화는 너무나 유명합니다.

“유행은 돌고 돈다” 자동차 작명(作名)의 세계

이름이 중요하다면, 자동차 회사는 작명을 위해 심혈을 기울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모델의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대변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니까요. 그렇다고 쉽게 붙일 수도 없습니다. 안락함을 강조한 차량에는 편안한 이름, 역동적인 주행 성능을 갖춘 모델에는 강렬한 이름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자연스레 ‘유행’이 생기기도 합니다.

예로부터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것은 휴양지(특정 지명)나 동물을 활용해 이름을 짓는 것입니다. 이탈리아의 유명 관광지 이름을 따온 쌍용차 ‘티볼리’, 미국 뉴멕시코의 관광지를 연상해 만들어진 현대차 ‘싼타페’, 미국 남서부의 휴양지를 채용한 현대차 ‘투싼’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는 쉐보레의 작명법에서도 발견됩니다. 국내에서도 널리 알려진 말리부의 경우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유명 휴양지고, 올란도 역시 플로리다주에 있는 관광지입니다.

▲ 현대차 투싼. 차명 ‘투싼’은 미국 남서부의 휴양지 이름에서 따왔다. / 출처 = 현대자동차

자동차 이전에 사람들이 마차를 타고 다녔다는 점에서 동물 이름도 많이 사용됩니다. 현대차 최초의 모델 ‘포니’에는 조랑말이라는 뜻이 담겼고, 에쿠스 역시 ‘개선 장군의 말’이라는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포드가 사용하는 머스탱(야생마), 쿠가(퓨마)에도 동물 이름이 숨어 있죠. 현대차 아슬란(사자), 쌍용차 무쏘(무소), 쉐보레 임팔라(임팔라) 등도 눈에 띕니다.

이 같은 작명법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외래어 사용을 통해 이색적인 분위기를 뽐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현대차 차명에는 대부분 영어 등이 사용되고, 영미권에서도 스페인어·라틴어 등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슈퍼카 업체 람보르기니 ‘우라칸’은 스페인어로 ‘허리케인’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자동차 이름에 바람 이름을 붙이는 등 특별한 시도를 하는 브랜드도 있습니다. 독일의 폭스바겐인데요. 골프(멕시코에서 부는 걸프 스트림이라는 바람), 폴로(북극에서 부는 찬바람), 파사트(무역풍) 등이 있습니다.

자동차 브랜드 ‘작명 전쟁’

최근에는 특정 자동차를 강조하는 대신 일정한 기준으로 모델명을 통일해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는 전략이 자동차 업계에서 유행하고 있습니다. 이를 ‘알파뉴매릭’이라고 부르는데요. 알파벳과 숫자의 조합을 통해 모델명을 쉽게 각인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기아차의 세단 라인업을 떠올리면 쉽습니다. 준중형차 K3, 중형차 K5, 준대형차 K7, 대형차 K9으로 구성돼 있죠. 앞에 있는 'K'는 기아라는 브랜드를 나타내고 뒤에 있는 숫자는 해당 모델의 차급을 표현해 줍니다.

르노삼성 역시 준중형차 SM3, 중형차 SM5, 프리미엄 중형차 SM6, 준대형차 SM7 등 모델을 갖췄습니다. SUV 모델에는 QM3, QM5, QM6 등 이름이 붙고요.

메르세데스-벤츠, BMW, 아우디 등 독일 3사는 알파뉴매릭을 전 라인업에 적용했습니다. 벤츠의 경우 모델 특성에 다라 A, B, C, E, S, M, G 등 알파벳을 사용하고, 뒤에 배기량과 관련된 숫자를 붙여 이름을 정합니다. E 220d의 경우 2.2 리터급 디젤엔진(d)을 장착한 E-클래스 모델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BMW도 1~7 시리즈로 라인업을 갖췄습니다. SUV 모델의 경우 앞에 ‘X’를 붙이죠. 520d는 2.0 급 디젤엔진을 얹은 5시리즈 세단 모델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X5는 BMW의 SUV 라인업의 5번째 모델이고요. 아우디 역시 세단은 A1~A8, SUV는 Q3~Q7 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알파뉴매릭의 장점은 상당합니다. 이름만 들어도 차급과 배기량을 이해할 수 있고, 관련 브랜드를 단번에 떠올릴 수 있습니다. 각 나라별로 이름을 새롭게 정해야 하는 수고도 덜 수 있습니다. (현대차 그랜저는 해외에서 아제라, 아반떼는 엘란트라 등 다른 이름을 사용 중)

▲ BMW X6 M 50d. BMW는 차명에 ‘알파뉴매릭’ 방식을 적용하고 있다. 앞에 있는 알파벳 ‘X'에는 SUV 라인업이라는 뜻, 뒤에 숫자 ’6‘은 6번째 큰 모델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M은 BMW의 고성능 라인업을 의미하고 ’50d'에는 5.0 리터급 디젤 엔진을 갖췄다는 뜻이 담겨 있다. / 출처 = BMW코리아

대신 이 때문에 뜻밖의 ‘전쟁’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이름이 비슷하게 겹치다 보니 분쟁이 생기는 것입니다. 아우디 A3, 기아차 K3, BMW 320d, 벤츠 C 200, 인피니티 Q50 등 다른 브랜드가 비슷한 차명을 사용한다는 것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테슬라가 있습니다. 당초 엘론 머스크 CEO는 자사의 전기차 라인업을 ‘S-E-X-Y'로 꾸미고 싶어 했습니다. 이를 위해 로드스터 이후 나온 세단에 ’모델 S'라는 이름을 붙였고, 다음에 나온 SUV에는 ‘모델 X'를 사용했죠.

내년께 출시를 앞둔 보급형 전기차에는 ’모델 E'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싶었는데, 이는 포드에서 이미 상표 등록을 마친 이름인 것입니다. 결국 테슬라는 ‘E'와 비슷한 이미지의 아라비아숫자 3을 사용, 신모델 이름을 ’모델 3‘로 정해야 했습니다.

현대차 역시 엘란트라가 한때 유럽에서 ‘란트라’로 팔린 적이 있습니다. 영국의 로터스카 ‘엘란’과 이름이 비슷하다며 소송을 걸었거든요. 나중에 기아차가 ‘엘란’의 상표를 샀고, 현대차와 기아차가 한몸이 되면서 아반떼는 다시 ‘엘란트라’라는 이름을 되찾게 됐습니다.

이 밖에 'Q' 상표권을 둘러싼 아우디와 인피니티의 소송전, 911 출시 당시 신경전을 벌였던 푸조와 포르쉐 등이 ‘작명 전쟁’의 주요 사례입니다.

현대차 코나, 하와이를 품다

현대차와 기아차는 나름대로 자동차 이름 짓기 법칙을 정해둔 상황입니다. 기아차는 세단에 K와 숫자 조합을 통한 알파뉴매릭 방식을, SUV 등 다른 라인업에는 기존 차명을 계승하는 방식을 사용 중입니다. 카니발은 축제라는 뜻, 쏘렌토·모하비 등은 각각 휴양지와 사막의 지명을 담고 있죠.

현대차 역시 아반떼, 쏘나타, 그랜저 등 기존 라인업 차명을 그대로 유지할 방침입니다. 수십년간 쌓아온 인지도가 상당하기 때문이죠. 새롭게 출시되는 차종에는 차량 특성에 맞는 이름을 붙이는 작업이 진행 중입니다. 기아차 스팅어에는 ‘찌르다, 쏘다’라는 뜻이 담겨 있고 현대차 아이오닉에는 새로운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이온(ION)’의 특징에 ‘독창성(UNIQUE)’을 더한다는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 현대차 코나 티저 이미지 / 출처 = 현대자동차

이런 와중에 현대차가 올 여름 글로벌 최초 출시를 앞둔 소형 SUV의 차명을 ‘코나(KONA)’로 정했습니다. 현대차는 싼타페, 투싼, 베라크루즈 등 세계적인 휴양지의 지명을 SUV 모델명으로 사용해오고 있습니다.

코나 역시 하와이 빅 아일랜드 북서쪽에 위치한 휴양지의 이름입니다. 자메이카의 블루마운틴, 예멘의 모카와 더불어 세계 3대 커피로 인정받는 ‘하와이안 코나 커피’의 산지로 유명한 곳이죠. 서핑, 수상스키, 스노클링 등 다양한 해양 레포츠를 즐기기에 최적의 날씨를 갖췄다고 하네요.

현대차 측은 “코나라는 이름에서 연상되는 부드러운 느낌과 함께 진취적이고 역동적인 이미지에 주목했다”며 “스타일과 실용성을 갖춘 소형 SUV의 제품 콘셉트를 잘 반영한다고 판단해 최종적인 차명으로 확정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국내 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B 세그먼트 SUV 시장이 무섭게 성장하고 있는 만큼, 이번 신차 출시가 현대차의 판매·이익 확대에 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현재 전세계 자동차 중 한글로 된 이름을 가진 자동차가 더이상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대우차 맵시나(1983년), 쌍용차 무쏘(1993년), 대우차 누비라(1997년) 이후 맥이 끊겼습니다. 토요타가 미라이(미래), 캠리(왕관) 등을 통해 자국어를 활용하고 있는 상황과 비교됩니다.

현대차의 양산형 수소차, 기아차의 소형 SUV, 쌍용차의 코란도 스포츠 후속모델 및 전기차 등 ‘후보’는 많습니다. 한글 이름의 승용차가 나올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