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가 29일 도시바 반도체 인수전에 참여했다. SK하이닉스는 이에 대해 "확인된 바 없다"는 입장이지만, 일본 현지 언론에 따르면 이미 SK하이닉스는 일본 재무적투자자(FI)들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인수를 시도하는 방침을 정한 것으로 보인다. 도시바의 반도체부문 매각입찰에 인수의향서(LOI)를 제출한다는 전제로 긴밀한 협상에 나섰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돌고 돌아 현지와 협력?
SK하이닉스가 일본 컨소시엄과 협력하는 지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초 대만 홍하이와의 협력 가능성이 타진되었던 상황에서 갑자기 현지 컨소시엄과 손을 잡은 배경에는, 일본 정부의 뚜렷한 방침을 의식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일단 도시바 입장에서는 당연히 자사의 낸드플래시 사업부 전체를 헐값에 팔 수 없다는 기류가 강하다. 회계분식 및 최악의 원전사업 실패로 인해 회사의 존폐를 고민해야 하는 상황에서, 알짜배기인 메모리 사업부마저 허망하게 놓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초 지분의 20%만 넘길 생각이었으나 생각보다 손실이 큰 상태에서 통째로 매각하는 것을 고민하고 있지만 제값을 받아야 한다는 의지는 변함이 없다.

도시바 주거래은행인 미쓰이스미토모은행과 미즈호은행이 미국 원자력자회사인 웨스팅하우스(WH)에 파산보호 신청을 요구하는 등 최악의 상황이지만, 도시바는 일을 간단히 처리할 수 없다. 메모리 반도체 사업을 제외하면 엘리베이터 등 사회인프라 사업을 주축으로 삼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강경한 기류가 여전한 상황에서 입찰에 뛰어든 10여개의 기업들의 속내는 더욱 복잡해졌다. 20조원에 달하는 인수금액이 부담이지만 낸드플래시 시장 2위를 차지하고 있는 도시바의 매력은 여전했기 때문이다.

일단 하나의 기업이 단독으로 입찰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고, 각자 자신의 짝을 찾아나서는 분위기가 연출됐다.

빠르게 움직인 쪽은 홍하이였다. 지난해 샤프 인수를 통해 일본의 디스플레이 경쟁력을 체화한 상태에서 도시바 메모리 반도체 사업까지 노리고 나섰다. 지난 1일 홍하이의 궈타이밍 회장은 샤프 디스플레이 공장 기공식에 참여해 "도시바를 위해 자금을 쏟아붓겠다"며 강한 의지를 보인 바 있다. 나아가 자국의 TSMC와 협력하는 방안을 타진하는 한편, SK하이닉스와의 협력 가능성도 열어두었다.

다만 여기까지는 업계의 예상범위였다. 홍하이가 TSMC를 비롯해 자사와 밀접한 파트너십을 유지하고 있는 SK하이닉스와의 연대를 타진하는 장면, 그리고 전통적으로 도시바와 협력하고 있던 웨스턴디지털의 움직임도 나름 설득력이 있었다.

인수전이 복잡한 양상으로 접어든 시기는 지난 23일 일본 정부의 개입 가능성이 현지 언론에 알려진 후다. 아사히신문은 23일 일본 정부가 이번 매각전에 최대 변수로 부상했다며, 도시바가 중국이나 대만 기업에 넘어가는 것을 막는 권고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필요하다면 관련법에 의거해 법적인 강제성을 가진 매각 중지권 명령도 고려한다는 후문이다. ‘외환 및 외국 무역법’을 도시바 매각에 적용하기로 정했다는 말도 나왔다. 이는 도시바 인수전의 이면에서 나오던 일본 정부의 개입을 명확하게 뒷받침하는 보도다. 3월 중순 경 익명의 일본 정부 관리는 "차라리 애플과 같은 미국 기업이 도시바를 인수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언론에 밝힌 바 있다.

일본 정부가 도시바 매각전의 최대 변수로 부상한 배경은 국가 안보 때문이다. 도시바의 메모리 반도체 기술력이 정부 전자기기 곳곳에서 활용되는 상황에서, 만약 핵심 기술이 타국 기업에 넘어갈 경우 심각한 안보 위기 상황이 올 수 있다는 우려가 깔린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이유로 SK하이닉스가 29일 일본 현지 컨소시엄과 협력하는 지점은, 이러한 일본 정부의 '변화'를 감지했기 때문으로 파악된다. 현지 보도의 행간을 보면 일본 정부는 일순위로 중국과 대만 기업의 인수 금지, 이순위로 아시아권 기업 인수 금지에 이어 자체적 해결이나 미국 등 서방의 기업이 도시바를 인수하는 쪽을 고려하고 있다.

SK하이닉스 입장에서는 운신의 폭이 '충분하지는 않지만' 분명 생기는 대목이다. 홍하이가 활발한 행보로 판을 깔았으나 일본 정부의 의지가 명확한 상태에서, 현지 컨소시엄과 협력하면 일정정도 공략의 틈을 발견할 수 있다. 게다가 웨스턴디지털은 자금이 부족하고, 애플 등이 당장 인수전에 전사적으로 뛰어들 가능성은 낮다. SK하이닉스 입장에서 모든 활로가 어렵다면, 차순위에 이름을 올려 승부를 걸겠다는 뜻이다.

다만 일각에서는 미일(美日) 합작 펀드의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이는 전자왕국을 재건하고 경쟁자에게 핵심 기술의 유출을 원하지 않는 일본 정부 입장에서 가장 '꽃놀이패'다. 인텔과 TSMC, 애플 등 인수 가능성이 희박하지만 도시바와 일본 정부 입장에서 충분히 매력적인 기업들이 인수전에 나설 가능성도 분명히 있다는 뜻이다.

▲ 메모리 반도체 시장 추이. 출처=IHS

위험한 승부수?
최태원 SK 회장 체제에서 SK하이닉스는 D램 일변도의 비즈니스 모델에서 탈피, 낸드플래시 사업 강화를 전면에 건 상태다. 당장 지난 2015년 8월 M14 준공식에서 선언했던 중장기 투자계획의 연장선에서 2017년 8월부터 2019년 6월까지 2조2000억원을 투자해 반도체 공장 건물과 클린룸을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게다가 그룹으로 보면 지난해 반도체용 특수가스 제조업체인 SK머티리얼즈를 인수하며 반도체 소재 사업에 진출했으며, 최근 반도체 칩의 핵심 기초소재인 반도체용 웨이퍼를 국내에서 유일하게 제조∙판매하는 전문기업인 LG실트론까지 품어낸 상태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면 SK하이닉스와 도시바의 만남은 그 자체로 고무적이다. 현재 낸드플래시 사업 점유율 10.4%로 5위를 기록하는 가운데 경쟁자를 보면  삼성, 도시바, 웨스턴 디지털의 점유율은 각각 36.6%, 19.8%, 17.1%다. 만약 SK하이닉스가 도시바의 낸드 사업을 인수에 성공한다면 2인자로 올라설 수 있다. 29일 출사표가 최태원 회장의 승부수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하지만 SK하이닉스와 도시바가 점유율에서는 차이가 나지만, 3D 낸드플래시적 측면에서 기술적 격차가 크게 벌어진 것은 아니다. 즉 인수에 따른 실효성을 충분히 따져야 한다는 뜻이다. 홍하이와 협력한다는 말이 나왔을 당시 '낸드플래시 경험이 없는 홍하이만 좋은 일 시켜주는 것'이라는 지적이 나왔던 부분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국제신용평가사인 무디스가 SK하이닉스가 도시바 인수에 성공한다면 "신용등급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우려한 지점도 의미심장하다. 국내에서도 비슷한 지적이 나왔다. 원종현 한국신용평가 연구위원은 SK하이닉스가 도시바 메모리 반도체 사업부를 인수할 경우 재무 부담은 즉시 확대되고, 투자 성과는 미래로 이연돼 영업적 불확실성이 높아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재무적 리스크를 컨소시엄으로 충당한다고 해도 이 역시 지나치게 유동적이다.

하지만 낸드플래시 시장이 크게 성장하고 있으며, 조만간 D램을 넘어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대표할 것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시장조사기관 IHS테크놀로지에 따르면 2015년부터 823억 기가바이트(GB)이던 낸드플래시 시장은 2020년 5084억 GB까지 확대되는 등 연평균 성장율이 44%에 달하며 장기호황의 초입에 들어섰다. 이 시장을 잡아내지 못하면 SK하이닉스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초유의 위기에 빠질 수 있다. 이번 SK하이닉스의 선택에 시선이 집중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