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에는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의약품 허가 심사비용을 올해보다 높게 책정할 것으로 예상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신약 허가 심사 시간을 단축시키겠다고 해 '트럼프 효과'를 기대하던 제약업계에 찬물을 끼얹은 셈이다. 게다가 트럼프 대통령의 '약가 경쟁 유도' 정책으로 국내 제약사들이 미국 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던 부분도 사실은 큰 효과를 보지 못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기 시작했다.
신약 허가 심사비용 인상 ‘약일까 독일까’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2018년 트럼프 정부가 FDA를 통해 의약품 또는 의료기기 업계에서 거둬들이는 신약 허가 심사비용을 20억달러로 책정한 것으로 나타났다. 2017년 FDA 심사비용 총액이 11억9000만달러 수준이었음을 고려하면 2018년에는 거의 2배가 높아지는 것.
트럼프 정부는 비용 인상의 배경으로 "FDA의 허가로 수혜를 보는 산업계가 그 몫만큼 비용을 지불할 수 있고, 지불해야 한다"고 밝혔다.
심사비는 제약사들이 신약허가신청서(NDA)를 접수하면서 부담해야 하는 승인 비용을 말한다. 따라서 FDA에 책정되는 심사비용 예산안은 기업들이 부담해야 한다는 뜻이다.
문제는 이 부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다. 높아진 심사비용이 앞으로 FDA의 신약 허가가 늘어날 것이라는 뜻인지, 아니면 NDA를 접수하는 제약사들의 부담이 더 높아진다는 뜻인지 알 수 없다는 것.
국내 제약업계 한 관계자는 "NDA에 책정된 심사비용 총액이 높아졌다는 것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며 "첫번째는 기업에게 부과하는 기존 심사비용은 그대로 유지하되 NDA 접수를 더 많이 받는 것이고 두 번째는 심사비용 자체를 두 배로 올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첫 번째의 경우라면 FDA 신청이 더 많은 만큼 허가 품목이 늘어날 것을 기대해볼 수 있다. 하지만 두 번째라면 허가를 신청하는 기업의 비용 부담이 기존보다 두 배 가량 높아진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관계자는 "FDA가 NDA 신청 건수를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은 두 번째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며 "이는 제약사 심사비용 상승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미국 진출을 준비하는 국내 제약사 입장에서는 부담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다국적 제약사는 기본적으로 글로벌 프로젝트를 만들거나 글로벌 임상을 준비할 때 9000억원에서 수조원의 예산을 편성하지만, 우리나라 국내 신약개발 예산은 1000억원이 안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비용 상승에 따른 부담은 상대적으로 우리나라 기업이 더 크게 느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FDA 최종 승인까지는 통상 수억원의 비용이 소요된다.
심사비용 증가는 다국적 기업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지만, 기업이 지불 가능한 예산 규모를 고려한다면 자금이 많은 기업에게 상대적으로 더 유리하다는 지적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FDA 신약 허가 과정을 단축시키겠다고 했지만, 비용이 높다면 허가 신청조차 할 수 없게 된다. 이번 예산안에서도 허가 시간 단축을 언급하긴 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의약품에 대해 얼마나 기간을 줄여줄 것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약가 경쟁 수혜도 '안개 속'...제약사 "지켜봐야"
지난 10일 트럼프 대통령은 스콧 고틀리브(Scott Gottlieb)를 차기 FDA 국장으로 지목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후 상원의 승인을 얻게 되면 공식적으로 FDA를 이끌게 된다. 고틀리브 차기 FDA 국장 후보는 '친제약' 성향을 보이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트럼프 대통령과 고틀리브 후보는 공통적으로 규제 완화를 통한 약가 인하를 주장하고 있다. 기업 간 경쟁을 유발 시켜 약가를 낮추겠다는 의미다.
이에 시장에서는 미국 시장에서 국내 제약사들이 제네릭의약품과 바이오시밀러로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제네릭과 바이오시밀러는 화학의약품과 바이오의약품의 복제약으로 통상 오리지널의약품보다 15~20% 낮은 가격으로 책정된다.
국내 제약사들이 제네릭에 강점을 가지고 있고, 최근 글로벌 시장에서 바이오시밀러 진출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어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약가 인하가 시장 경쟁을 더 과열시킬 수 있어 국내 제약사들이 수혜를 보기 어려울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업계 전문가들은 이미 제네릭의약품은 가격이 낮게 형성 돼 있어 실제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시장 장악력은 높일 수 있어도 경쟁으로 인해 가격이 너무 낮아지면 수익으로 이어지기는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다.
바이오시밀러 역시 많은 제약사들이 연구개발을 진행하고 있어 경쟁 심화 우려가 있다. 다만, 국내 제약사들이 현재 시장에서 퍼스트무버로 움직이고 있다는 점은 긍정적이라는 평가다.
이에 대해 제약 업체들은 "아직 트럼프 정부의 정책이 구체적이지 않고, 시행되기까지는 1~2년 이상의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고 있어 상황을 지켜보는 중"이라는 입장이다.
미국 내에서도 업체 간 경쟁을 통한 약가 인하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트럼프 정부의 고틀리브 FDA 국장 선임에 대해 일부 제약사 및 환자 단체는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지나친 규제 완화가 환자 안전을 침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부 감시단체인 퍼블릭시티즌(Public Citizen)은 고틀리브가 제약업계와 끈끈한 관계를 이어온 점을 지적하며 "환자보다 산업계 이익을 대변해 온 정부 기관을 부추길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태영 메리츠종금증권 연구원은 "FDA 개혁으로 환자에게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하고 비정상적인 의약품 가격을 낮춰야 한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에 비춰보면 항암제나 희귀의약품과 같은 치료적 미충족 수요가 강한 분야의 후보물질 허가 기간 단축이 예상된다"며 "보충이 필요한 분야부터 우선적으로 규제 완화가 이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항암제나 희귀의약품으로 범위가 좁혀지면 결국 국내 제약사들이 '트럼프 효과'를 제대로 누릴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는 평가다.
한편, FDA가 희귀의약품으로 지정한 후보물질로 미국 임상을 진행하고 있는 국내 기업은 신라젠, 바이로메드, 메지온, 큐리언트, 지트리비엔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