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데, 다르다.”

2017년 한국과 1989년 일본의 모습을 두고 하는 말이다.

시기는 다르지만 두 나라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뤘고, 호황 이후 장기적 경기침체에 이르는 과정에서도 유사성이 보인다.

각각의 시기에 두 나라는 버블경제가 빠진 후 불황임에도 불구하고 외식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했으며, ‘먹는 것’에 대한 사람들의 수요에 변화가 찾아왔다.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를 따지는 소비자들은 맛있으면서도 저렴한 메뉴에 호응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트렌드가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아울러 1인 가구의 폭발적인 증가로 ‘혼밥(혼자 밥을 먹는 사람)’을 하는 사람들을 겨냥한 간편식이 대세를 이뤘다. 우리나라 역시 최근 3-4년 사이 1인 가구와 혼밥족이 떠오르는 것과 비슷한 양상이다.

다만, 현재의 한국과 일본의 진행 과정을 보면 비슷하면서도 세부적으로 보면 다르다는 점이 주목된다. 그 세부 사항을 통해 향후 우리가 맞이할 수도 있는 미래를 추측해 보려고 한다.

좋은 것이 있다면 적절하게 ‘벤치마킹(Bench Marking)’하면 되고, 궁극적으로는 ‘퓨처마킹(Future Marking)’을 통해 미래를 내다봐, 결국 우리가 ‘오리진(Origin)’이 될 수 있는 그림을 그려보는 것이다.

잃어버린 10년 

과거 일본의 경제를 단적으로 대변했던 문구가 있다. 바로 ‘失われた10年(잃어버린 10년)’이다. 이는 1980년대 말~1990년 초기 일본의 주식과 부동산 가격이 폭락하면서 수많은 기업과 은행이 도산함에 따라 약 10년(1991~2000년) 가까이 0%대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던 시기를 의미한다. 전문가들은 여기에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까지도 고려해 2010년까지를 ‘잃어버린 20년(혹은 30년)’으로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으나, 결론적으로 불경기의 장기 지속이라는 점에서 맥락은 같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약 30년 전 일본의 불황으로 나타난 여러 가지 현상들이 2017년 우리나라에도 거의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점이다. 과연, 일본 경제에 나타났던 경기침체기의 양상은 우리나라의 현재 상황과 유사한 점은 무엇이며 우리가 주목해야 할 요소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버블’에서 시작된 악순환의 루프…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었다

위 그림을 보고 소름이 돋는다고 하면 그건 절대 ‘기분 탓’이 아니다. 현재 우리나라 경제상황의 가장 큰 문제점들이 거의 그대로 나타내는 흐름이기 때문이다. 이는 1970~80년대 버블 경제(Bubble Economy, 호황으로 실물자산의 가치가 거품(Bubble)처럼 부풀어 과대평가된 경기상태)가 끝난 이후 나타난 일본의 경기 침체를 표현한 그림이다.

‘버블 경제’라는 전제에서 알 수 있듯, 일본은 경기 침체 직전까지 어마어마한 호황기를 누리고 있었다. 1955년부터 1970년에 이르는 15년 동안 일본 경제는 연평균 성장률 9.6%라는 ‘기적에 가까운’ 성장세를 기록했다. 민간 기업들은 설비 투자에 매진(설비 투자 신장률 13.4%)했고 이로 인한 소득 향상과 소비의 신장은 다시 기업의 생산 활동 규모를 확대하고 기술 개발을 유도했다. 아울러 1949년 말 2억달러였던 일본의 외환 보유고는 2년 후인 1951년 9억4000만달러로 증가했다. 일본 정부는 긴축재정의 지속으로 물가 하락과 내수 진작, 수출 확대를 추진해 1950년대 후반부터 일본 경제는 고도의 성장기를 맞이하게 된다.

한편, 그간 낮은 달러 환율(1달러=242엔)로 수출 시장에서 가격경쟁력의 혜택을 누려왔던 일본에 대해 미국과 유럽의 국가들이 반발하기 시작했다. 이에, 미국을 포함한 4개국(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은 달러화 가치의 하향 조정과 더불어 각 국 통화 가치를 10~12% 상승시키기로 합의했다. 이것이 1985년 뉴욕 플라자호텔에서 개최된 5개국 재무장관회의인 플라자 협정(Plaza Accord)다. 일본의 엔화 가치는 1달러=242엔에서 1985년 말 1달러=200엔, 1988년 초에는 1달러=128엔까지 상승한다.

이에 환율 조정으로 환리스크를 감당해야 하는 미국 채권 등 해외 투자 자금은 일본 시장으로 유입됐고 일본의 주식과 부동산 가격이 급등한다. 80년대 일본의 부동산은 “도쿄의 땅을 전부 팔면 미국 땅을 전부 살 수 있다”는 말이 돌 정도로 과열된다. 주식시장에서는 1984년 1월 10일 일본 역사상 최초로 10000대를 돌파한 니케이 지수가 5년 후인 1989년 12월 19일38915.87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한다. 일본의 기업들은 단기간 투자로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부동산과 주식에 막대한 돈을 투자한다. 그간의 자본 축적으로 돈이 넘쳐났던 일본의 은행들은 앞다퉈 기업들의 투자를 지원했다. 이것이 바로 버블 경제다.

엔화 가치 상승은 과열된 일본의 부동산 시장의 수요를 격감시켰고, 여기에 막대한 돈을 쏟아부은 기업들의 줄도산이 이어진다. 일본 금융감독원 자료에 따르면 1998년 12월 일본의 19개 주요 은행들은 394조엔(약 3900조원)의 대출 중 약 57조엔(570조원)의 부실채권을 떠안게 되는데 기업들의 도산으로 즉시 상환받을 수 있는 돈 5조4000억엔을 제외한 49조6000억엔(490조원)을 소위 ‘날리게’ 된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상승세를 탔던 일본 경제는 경기 악순환을 반복하는 긴 암흑기를 맞이한다.

가격 대비 소비 효용의 강조… 불황이 바꾼 일본의 소비와 유통

경기 불황이 반영된 변화가 가장 잘 나타났던 분야 는 바로 국민들의 ‘소비’다. 5년에 한 번 일본 총무성(통계청)의 주도로 실시된 ‘전국소비실태조사(全国消費実態調査)’의 내 용을 보면 불황기에 대응하는 일본 소비자들의 소비 패턴을 파악할 수 있다.

조사에 따르면 1994년 일본인들의 월간 평균 소비지출액(공공 서비스요금 제외)은 14만9400엔에서 2004년 13만1000엔대 로 하락했다. 경기 불황에 따라 국민들이 의도적으로 소비를 줄인 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비용 절감 차원에서 가능하면 저 렴하게 상품을 구매할 수 있는 유통업체들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1994년 5398엔이었던 디스카운트 스토어(할인점) 혹은 양판 전문점에서의 월평균 지출은 2004년 1만3000엔으로 2배 이상 증가했다. 전체 소비에서의 비중도 1994년에는 3.6%, 1999년에는 4.9%, 2004년에는 9.8%로 증가해 10년 사이 2배 이상 늘었다. 반면, 이전까지 일본 유통업계의 주류(主流)로 취급받던 백화점, 일반소매점, 슈퍼마켓의 지출액과 지출 비중은 모두 감소세를 나타냈다.

한편, 이러한 소비 위축의 추세 가운데 오히려 매출이 가장 크게 늘어난 업체들이 있었으니 바로 캐주얼 의류업체 ‘유니클로 (UNIQLO)’와 중저가 인테리어 가구업체 ‘니토리(ニトリ)’다. 유니클로와 니토리는 합리적 가격과 만족스러운 품질을 표방하 는 패스트 패션(Fast Fashion)과 저가형 인테리어를 지향해 적은 비용으로 높은 소비 효용을 취하려는 일본 소비자들에게 각광받았다. 이에 따라 일본의 주요 유통 채널들도 불황에 대응하는 소비 패턴에 맞추는 전략적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 일본의 불황으로 떠오른 기업들. 유니클로(왼쪽)와 니토리(오른쪽). 출처= 각 사

PB(Private Brand, 유통업체에서 제조한 자체 브랜드)의 보급은 일본 소비자들의 절약지향 및 저가격지향을 반영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는 이온그룹의 톱벨류(TOPVALU), 세븐 엔 아이홀딩스의 세븐 프리미엄 등이 있다. 그간 고급화 노선 을 달려왔던 백화점들도 점점 PB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일본의 대형 백화점 체인 세이부(西武) 백화점 도쿄 이케부쿠로 (池袋)점은 2010년 9월 증개축 공사 이후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웠던 이전과 달리 일상생활의 일부를 담당하는 문턱이 낮은 판매점이 될 것을 추구하며, 의류와 디저트 식품군의 PB를 만들어 판매하기 시작했다.

한편, 일련의 경우들과 정반대로 일본의 소비자들에게서는 고급화 지향 소비 패턴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현재 수준에서 즐 길 수 있는 고급품 즉, 좋은 품질로 소비에 대한 만족도가 높으면 다소 가격이 비싸도 구매하는 것이다. 일본의 주류업체 산토리(サントリー)는 저가형 맥주 ‘긴무기(金麦)’와 더불어 고급 브랜드 ‘The Premium Malts’를 동시에 판매해 두 상품 모두 히트 브랜드의 반열에 올렸다. 한편, 편의점 로손(LAWSON)에서 출시한 ‘프리미엄 롤케익’은 다른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케 이크에 비해서는 고가였지만, 뛰어난 맛으로 출시 후 큰 인기몰이를 했다.

일본리서치종합연구소의 후지와라 히로유키(藤原裕之) 연구원은 ‘不況期の消費者の心理と企業の対応(불황기 소비심리와 기업의 대응, 2009)’이라는 이름의 보고서를 통해 “불황기 일본에서는 소득 면에서 여유가 없는, 소비를 줄이는 계층에서는 제품 구입을 연기하거나 자체 수리 등으로 대체하는 한편 소비 여유가 있는 계층에서는 가격이 싼 제품보다는 품질과 기능 면에서 가치가 높은 상품을 구매하는 코스파(コスパ, Cost-Performance) 소비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며 “소비재 기 업과 유통업체들은 자연스럽게 이러한 소비 흐름에 맞는 전략적 마케팅을 전개하게 됐다”고 말했다.

일본의 불황에서는 지출비용 감소와 더불어 상품이나 서비스의 품질이 효용가치를 떨어뜨리지 않는 수준이라면 구매를 결 정하는 효용 중심 소비 유형이 나타났다. 이러한 흐름들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장기 경기침체기에 접어든 한국에 서도 거의 그대로 나타난다. 

한국의 경기침체와 소비 유형… 소비 여력 감소, 효용 중시

일본과 한국의 경제 격차는 ‘10년 차이’라는 말로 표현되 곤 했다. 그러나 1980년대 말~1990년대 한국의 경제도 비약적 성장세를 보임에 따라 그 격차는 점점 좁혀졌다. 공교롭게도 이러한 한국의 경제성장 배경에는 플라자 협정 이후 엔고(円高)로 수출 가격 경쟁력을 잃은 일본의 불황이 반사이익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이후 한국은 IT 기술과 문화 콘텐츠 등 일부 산업 분야에서는 일본을 추월하며 승승장구의 모습을 보이 는 듯했으나, 1997년 IMF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 무기력하게 무너지며 버블경제 이후 장기적 경기침체에 빠 진 과거 일본의 상황이 거의 그대로 재현됐다.

실제로 1996년까지 7~9%대 이상의 높은 성장률을 유지했던 한국의 경제는 2008년 이후 평균 성장률 3%대에 머물러 있 다. 2010년 6.5% 성장을 제외하면 4% 이상의 성장률을 기록한 해는 없었다. 2015년, 2016년은 연이어 2.6%, 2.7%의 성장률 을 기록하며 끝을 알 수 없는 저성장의 늪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 50년대 이후 꾸준하게 축적해온 경제적 내실이 있어 10~20년간의 긴 경기 침체를 지나는 과정에도 경제 강국 의 입지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은 일본 정도의 ‘맷집’은 없었기 때문에 온갖 위기에 일본보다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습들이 나타났다.

재미있게도 1989년 이후 불황기의 일본에 나타났던 현상들은 2010년대 이후 한국에도 거의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의 소비 영역에서는 2015~2017년에 이르는 약 3년 동안 ‘가성비(Cost-Effectiveness, 價性比)’라는 단어가 그 어느 때 보다 빈번하게 사용됐다. 가격 대비 성능(품질) 만족이라는 의미를 가진 이 말의 시작은 경기 침체로 인한 소비자들의 소득 감소, 그로 인한 소비 여력 감소에서부터 시작했다. 같은 비용의 지출을 가정할 때 가능하면 가격이 저렴한 제품 혹은 그러 한 제품을 판매하는 유통 채널을 선호하는 경향으로 나타났다. 이는 흡사 1990년대 일본의 코스파 소비 유형의 재현이다.

그를 단적으로 설명하는 예가 바로 온라인 마켓의 성장이다. 한국의 온라인 마켓들은 유통 구조의 간소화를 통해 비용을 줄인 만큼 제품을 저렴하게 판매하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한국 소비자들의 입장에서는 오프라인 유통 채널들보다 저 렴한 가격으로 동일한 상품을 구매할 수 있는 창구가 바로 온라인 마켓이었다. 이에, G마켓·옥션·11번가·인터파크 등 오픈 마켓과 쿠팡·위메프·티몬 등 소셜커머스를 표방했던 업체들은 2010년 이후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인다. 한국 통계청의 조사에 따르면 2015년 한국 온라인 쇼핑의 총 거래액은 53조8883억원을 기록하며 2001년(3조3471억원)보다 16.1배 증가한 수치를 나타냈다. 성장률로 계산하면 15년 동안 매년 22% 성장한 셈이다.

▲ 이마트 PB 간편식품 브랜드의 전문 매장. 출처= 이마트

한편 오프라인 유통을 대표하는 백화점의 시장 점유율은 2001년(10.4%)부터 2016년(7.8%)까지 지속적으로 감소한 반면, 박리다매를 지향한 대형마트들은 같은 기간 10.3%에서 13.7%로 성장했다. 이 역시 소비 비중에서 백화점이 축소되고 할인매장의 비중이 높아진 일본의 경우와 거의 같다. 다양한 소비재들의 PB화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