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금융권, 법조계 고위 인사들의 사적인 대화 자리.

"박근혜 전대통령의 무능은 말할 것도 없는데, 그 결정적인 증거가 된 정호성 녹음파일, 안종범 수첩, 이게 더 놀랍지 않아? 이제 누구에게 전화를 맘대로 하겠어? 회사 주요 결정을 하기 전에 참모랑 통화하는데, 참모가 자동 녹음하고 있으면 어떻게 해?"

"회의 때 내가 하는 말 열심히 적는 임원들이 이제는 무서워지더라구. 그래서 어이, 그거 적지말고 그냥 말로만 하자. 그리고 휴대폰도 갖고 들어오지마 그러잖아. 녹취할까봐."

"우리 그룹에서는 휴대폰을 바꾸자는 얘기를 고위층끼리 얘기했어요. 우리 회사는 투자와 관련한 중요한 얘기를 많이 할 수 밖에 없잖아요. 정호성이 한 걸 보니, 안드로이드폰은 다 자동녹음된다잖아. 그래서 운영체계가 다른 아이폰으로 바꿔야 하는거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왔어요."

"내가 스마트폰을 바꾼다고 뭐가 해결돼? 전화 받는 상대방이 녹음해버리면 말짱 꽝인데. 최소한 그 쪽이 녹음하고 있는지를 알고는 있어야 하는거 아냐. 통신사가 그런거 해줘야하는거 아냐?"

이 자리가 끝난 후 며칠뒤 또다른 기업의 고위 임원에게 물어봤다. 어떤 휴대폰을 쓰시는지. 아이폰이라는 답변에 자동녹음기능 없는거 아느냐고 물었더니 "다 (기능)있는 거 아닌가"라며 찾아보더니 그 기능이 없는 것을 알자 "처음 알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 정호성 녹음파일.

하지만 범죄사실에만 경악할 뿐 사회는 자동 녹음이 되는 스마트폰의 무서움엔 둔감하다. '자동녹음' 또는 '통화중 녹음'이라는 편리성에 빠져 우린 뭔가를 놓친 건 아닐까. 비단 은밀한 모의를 꿈꾸는 어두운 사람들만의 두려움일까.

 ◇감시당하는 강자들은 투명해야 한다?

하나의 시각은 고위층에 대해 엄격하게 감시해야 한다는 '투명성' 주장이다. 

"약자에게는 프라이버시를, 강자에게는 투명성을". 이 유명한 명제는 약자들에게는 강하게 보호돼야 하는 부분을 강자들에게는 투명하게 공개하라고 말한다.

일반인들이 생활 속에서 침해받는 프라이버시는 보호돼야 한다. 그러나 공공성이 지켜져야 하고 법제화된 매뉴얼 위에서 군림하는 강자들의 세계에서는 투명성이 먼저라는 의미다.

<시민을 위한 테크놀로지 가이드>, <검색되지 않을 자유>의 저자 임태훈 대구경북과학기술원 융복합대학 기초학부 교수는 "나쁜 기술은 없다.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의 권력관계, 사회적 맥락이 중요하다"며 "같은 기술을 사용하면서도 약자의 프라이버시를 보존하고 강자에게는 투명성을 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출처=픽셀

◇'통화 중 녹음 기능' 프라이버시 침해하는 나쁜 기술일까

통화 중 녹음 기능은 박 전 대통령을 파면으로 이끈 숨은 조력자다.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 휴대전화 두 대에서 통화 녹음 및 실제 대화 녹음 파일 236개가 나왔다. 236개의 파일 중 최순실씨와의 통화 및 박 전 대통령의 대화를 담은 녹음 파일이 있었다. 이 파일들은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의 수첩 17권과 함께 중요한 자료로 분류된다.

녹취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정보 유출을 염려하는 기업들도 있다. 비즈니스상 극비로 처리돼야할 정보와 계약 조건 등이 빠져나갈 수 있다는 이유다. 이미 몇몇 기업들은 정보 유출을 우려해 고위직급 임원들에게 아이폰을 사용하라고 지시했다는 후문이다. 애플과 달리 삼성전자와 LG전자는 통화 중 녹음 기능을 제공한다.

국내에서는 통화 중 녹음이 불법이 아니다. 이에 통신사들은 자동녹음 기능이 있는 어플을 출시한다. 외국 상황은 다르다. 대부분 나라에서 불법이다. 구글 플레이스토어와 국가 간 협약으로 통화 녹취 앱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애플은 아이폰 운영체계인 iOS는 자동녹음 애플리케이션(앱) 설치를 허용하지 않는다.

SK텔레콤 이용자는 따로 앱을 받지 않아도 자동녹음 기능을 이용할 수 있다. 기기에 미리 설치된 SK텔레콤 전화앱 T전화가 자동녹음 기능을 지원한다. 자동녹음을 이용하고 싶으면 설정만 해놓으면 된다. KT는 자동녹음 앱 '후후'를 선보이고 있다. 앱에서 자동통화녹음을 설정할 수 있다. LG유플러스는 자동녹음 앱을 선보이진 않았으나 플레이스토어에서 다운받아 쓸 수 있다.

통화 중 녹음 기능이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것은 아닐까. 임 교수는 "프라이버시 침해 여부를 따질 때 '어떤 사회적 관계'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느냐를 유심히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기업·정부 기관 등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목소리가 녹음되는 걸 두려워한다. 여기엔 한국 특유의 맥락이 있다"며 "합리적이고 공개적으로 드러냈을 때 떳떳하지 않은 수많은 것들. 기록되는 걸 두려워하는 이 사회 분위기가 기능적인 부분을 논하기 전에 먼저 정리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사회적 약자들이 공격의 도구로 이 기능을 사용하는 것은 다르게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녹취나 녹음이 하급자에게는 '저항방식'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수직적인 조직 내에서 업무처리 방식상 부당한 상사의 명령을 이행하며 자신을 보호하는 방식으로는 녹취나 녹음이 유일한 방식"이라고 덧붙였다.

임 교수는 저서 <시민을 위한 테크놀로지 가이드> 서문에도 이렇게 썼다. "나쁜 사회는 탁월한 기술조차 비루한 일상의 부속품으로 끌어내린다. 인간이 사회에서 겪는 온갖 부조리와 부정이 되풀이되는 것이다. 사회를 바꾸지 않고 인간과 기술을 구해낼 방법이 없다."

▲ FBI와 팽팽히 맞선 애플. 출처=플리커

◇그러면 아이폰은 인간을 시험에 들지 않게 하려고?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예전보다 손쉽게 기록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 임 교수는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디지털카메라, 스마트폰 녹음 기능 등 자신이 있는 현장을 기록하는 생활화 됐다. 부동산 거래 현장 등에서 녹음을 따고 파일로 저장하는 건 이제 일반적이다. 공증, 물증이 필요한 부분에서 증거로 쓰이는 시대"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아이폰에서는 통화 중 녹음 기능을 사용할 수 없다.

아이폰을 추종하는 한 매니아 고위층은 "이게 바로 애플의 인문학"이라며 "인간성에 대한 존중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석했다.

사실 이는 애플 창업자 고(故) 스티브 잡스의 지론이었다. 잡스는 "통화 중에 몰래 녹음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했고 일부러 통화 중 녹음 기능을 아이폰에서 뺐다고 알려졌다. 아이폰은 개인정보보호가 철저하기로 유명하다. 개인정보보호를 이유로 FBI의 '테러범 아이폰 잠금해제 요청'을 거부하기도 했다.

지난해 2월 팀 쿡 애플 CEO는 FBI 테러범 아이폰 잠금해제 요청을 거부하며 '고객에게 드리는 글'을 올렸다. 그는 "아이폰은 애플도 고객정보에 접근할 수 없도록 설계됐다"며 "우리는 오랜 시간 암호화를 통해 이용자의 개인정보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해왔다"고 강조했다.

애플의 강력한 개인정보보호정책은 이제 애플을 규정하는 또 하나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아이폰 잠금 설정은 당사자 말고는 풀 수 없으며, 통화 중 녹음이 불가능하다. 문자 메시지나 사진 등의 정보도 암호화돼 저장된다. 특히 통화 중 녹음 기능은 미국 현지법을 따르는 동시에 강력한 애플의 정책인 셈이다.

현재 미국 12개 주와 영국, 프랑스 등 유럽 주요 국가에서는 통화 내용을 상대방의 동의 없이 녹음하는 게 금지다. 이 때문에 LG전자와 삼성전자 등 국내 스마트폰 업체들은 수출할 때 통화 중 녹음 기능을 빼고 수출한다.

LG전자 관계자는 "각 나라별로 요구사항이 다르기 때문에 기능을 조절해 수출한다"고 설명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도 "많은 나라들에서 불법이라 수출 제품에는 통화 녹음 기능을 거의 넣지 않는다"며 "통화 중 녹음 기능을 탑재해 수출하는 나라는 중국, 일본, 베트남, 그리고 우리나라 등 네 나라뿐"이라고 전했다.

한국에서는 휴대전화로 통화하는 중에 한쪽이 녹음을 했을 때 상대방의 동의가 없었더라도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은 아니다. 물론 타인의 통화를 녹음하거나, 엿들으려는 목적으로 통신장비를 설치해 녹취하는 것은 불법이다.

아이폰으로 통화 중에 녹음할 수 있는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시중에 나와있는 통화 중 녹음 앱을 사용할 수 없지만 탈옥을 하면 이용할 수 있다. 탈옥이란 아이폰 권한 설정을 강제로 해제해 모든 기능을 활성화시키는 것을 뜻한다. 이 밖에도 아이폰 사용자들은 스피커폰으로 설정해 통화 내용을 녹음하거나, 블루투스로 소리만 빼서 녹음을 따기도 한다. 

약자에게 유리한 '통화 중 녹음' 기능. 투명성을 요구받는 강자의 두려움은 그들만의 몫일까. "대화 중에 몰래 녹음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은 우리사회에선 불필요한 잡스만의 지론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