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스탤지어(Nostalgia)

[명사] 고향을 몹시 그리워하는 마음. 또는 지난 시절에 대한 그리움

 

‘빙하 타고 내려와 친구를 만났지만 일억 년 전 옛날이 너무나 그리워. 보고픈 엄마 찾아 모두 함께 떠나자.’ 빙하에 갇혀 일억 년 후로 표류한 공룡(둘리),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인(도우너), 서커스에서 도망쳐 나온 아프리카 출신 타조(또치), 유학을 떠난 부모와 떨어져 고모부 품에서 자라는 갓난아이(희동이)까지. 저 가사처럼 <아기공룡 둘리>를 지배하는 정서는 그리움이다. 말하자면, 둘리와 친구들은 노스탤지어라 부를 만한 상태에 빠져 있다.

호퍼라는 17세기 오스트리아의 한 의사는 고향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군인들을 진료하며 그들의 심리 상태에 ‘노스탤지어’(Nostalgia)라는 이름을 붙였다. 귀환을 뜻하는 그리스어 ‘노스토스’와 병이나 고통을 가리키는 ‘알고스’라는 단어를 합친 말이다. 노스탤지어란 고향을 향한 병적인 그리움과 그로 인해 느끼는 고통을 가리킨다. 호퍼는 노스탤지어의 치유책은 하나뿐이라고 말했다. 바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향에 돌아갈 수 없을 때 노스탤지어는 치유할 수 없는 병이 된다.

문제는 귀향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데 있다. 시인 정지용은 ‘고향’이라는 시에서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며,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고 노래했다. 고향에 돌아왔지만, 그곳은 이미 그리던 고향이 아니라는 말은 알쏭달쏭해 보이지만 노스탤지어의 본질 하나를 정확하게 짚고 있다. 임철규는 칸트의 말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칸트는 노스탤지어의 본질을 파악하여 고향을 애타게 그리워하는 사람을 두고 그 사람이 진정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은 특정 장소, 즉 그의 어린 시절의 고향 땅이 아니라 특정 시간, 즉 그가 고향 땅에서 보낸 바로 그의 어린 시절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지나간 시절은 더 이상 되돌릴 수도 없고 되찾아질 수도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이 고향 땅에 돌아간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칸트는 귀환의 존재론적 불가능성을 이야기했다.’(임철규, <귀환>)

둘리의 고향이 일억 년 전 과거이며 그들의 모험이 도우너의 타임머신을 중심으로 진행된다는 만화의 설정은 꽤나 절묘하다. 본질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불가역적이다. 누구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다. 노스탤지어가 그리워하는 본토가 과거라면, 진정한 의미에서 귀향은 가능하지 않다. 둘리의 이야기가 애잔한 이유 역시 그들이 결국 고향에 다다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만화는 1983년 <보물섬>이라는 잡지에 연재를 시작해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압축성장으로 세상이 정신없이 바뀌고 다들 고향을 떠나 도시로 이주하던 시절이었다. 그립지만 돌아가지 못하고, 돌아가지 못하지만 끝내 잊지 못하는 둘리의 모습에서 저 폭발적인 인기의 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다.

하지만 귀향의 불가능성이 꼭 인간의 운명을 서글프게 만드는 것만은 아니다. 벤야민은 혁명을 가리켜 ‘과거를 향해 내딛는 호랑이의 도약’이라 말했다. 과거를 향한 향수가 풀이 죽은 그리움에 머물지 않고 잃어버렸지만 되살릴 가치가 있는 것들을 기억하고 복원하려는 투쟁으로 이어질 때, 그래서 현실과 싸우는 동력이 될 때 노스탤지어는 혁명으로 가는 길목이 될 수 있다. 사라진 과거를 향한 노스탤지어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인 유토피아와 조우할 수 있는 건 그 때문이다.

둘리는 끝내 과거로 돌아가지 못한다. 하지만 낯선 미래에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얻고, 긴 모험을 함께 겪으며 우정을 나눈 친구들과 가족 같은 사이가 된다. 이 만화가 훌륭한 이유는 과거를 향한 그리움 못지않게 새로운 고향을 만드는 과정에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한국의 정치는 최근에 꽤 오랫동안 노스탤지어의 각축장이었다.

그리고 2017년 3월, 한국인이 마주한 건 호랑이의 도약이 되지 못한 체념적 노스탤지어가 가져오는 비참한 현실이다. 역사를 잊으면 미래가 없다지만, 과거에 사로잡힌 정치는 역사를 도리어 퇴보시킨다. 호랑이의 도약이 되지 못하는 노스탤지어는 질병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