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할 때는 축구화를 신는다. 농구할 땐 농구화다. 배드민턴 프로선수는 일반인보다 좋은 라켓을 사용한다. 테니스와 배드민턴, 스쿼시와 탁구에서 사용되는 라켓 종류가 다르다. 전문 장비 없는 스포츠란 상상하기 어렵다. 그들은 장비와 함께 한계에 도전한다.

e스포츠 프로게이머들도 한계에 도전하는 사람들이다. 순간의 판단에 따라 승패가 갈리는 까닭에 미세한 차이에도 민감하다. 매번 그런 건 아니지만 실력 차이는 장비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그들은 게이밍 기어를 사용한다. 수십만원을 호가하는 게이밍 기어를 현란하게 조작해 승리를 거머쥔다.

게이밍 기어가 프로게이머의 전유물인 건 아니다. 게임시장이 확대되면서 전문 장비에 대한 일반 수요가 늘었다. 글로벌 게이밍 기어 브랜드들은 가성비(가격대비 성능비)가 특출난 제품을 선보이며 보통의 게이머를 고객으로 끌어들이려 한다. PC와 주변기기 시장이 하락세에 직면한 가운데 게이밍 기어만이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

게임은 콘텐츠다. 소프트웨어의 영역이다. 게이밍(Gaming)은 다르다. 게임을 즐기려면 유저는 하드웨어라는 도구를 거쳐야 한다. 게임이라는 콘텐츠가 하드웨어 영역과 맞물려 게이밍 경험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두 영역은 긴밀하게 연결된다.

이번 커버스토리는 게임 없는 게임산업 리포트다. 하드웨어 관점으로 게임시장을 바라봤다. 잠재력이 폭발하고 있는 게이밍 기어 시장에서부터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말이 따라붙는 가상현실 게임시장까지 동일선상에 놓고 해부한다. 침체에 빠진 콘솔 게임기 시장의 미래도 논한다.

마지막으론 제약과 한계를 이야기한다. 그 극복에 대해서도 물론 다룬다. 하드웨어는 최상의 게이밍 경험에 있어 물리적 한계이기도 하다. 예컨대 게이머는 어젯밤 거실에서 TV로 즐기던 게임을 다음날 출근길 지하철에서도 이어서 즐기고 싶어 하는데 디바이스 사이에 놓인 장벽에 가로막힌다. 게이밍의 연속성을 확보하기 위한 디바이스 융합 조짐들도 검토했다.

한계를 뛰어넘어 게이밍 경험을 확장하는 것, 이는 게임 하드웨어 산업의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핵심 화두다.

<게이밍에 한계란 없다: 게임 하드웨어 경제학>

① ‘게이밍’을 더했더니 ‘부가가치’ 생기더라

② 가상현실 게이밍 시대, 아직 시기상조?

③ 그들은 왜 1.5%짜리 게임기 시장에 도전하나

④ 언제 어디서든 중단 없는 게이밍 꿈꾸다

 

A 씨가 요즘 즐겨 하는 게임이 있다. ‘스타크래프트’로 유명한 블리자드에서 만든 ‘오버워치’다. 유저들과 팀을 이뤄 6대 6 실시간 전투를 펼치는 FPS(1인칭 슈팅게임)이다. 장르 특성상 신속하고 정확한 조준·발사가 중요하다.

누적 플레이 시간이 50시간에 가까워질 무렵 A 씨는 고민에 빠졌다. ‘왜 실력이 더 늘지 않는 거지?’ 그러다가 손에 쥔 마우스를 바라봤다. 프로게이머가 사용하는 게이밍 마우스로 바꾸면 실력이 느는 것은 아닐지 생각했다.

인터넷을 뒤적거리다 FPS 장비 커뮤니티를 발견했다. A 씨는 자신처럼 오버워치를 즐기다가 게이밍 마우스에 눈독 들이고 있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란 걸 알아냈다. 게이밍 기어 브랜드는 엄청나게 다양했다. 무엇을 살까 고민하다가 ‘로지텍 G102 프로디지’를 택했다.

 

일반 마우스 안 팔려도 게이밍 마우스는 팔린다

“오버워치가 인기를 끌면서 게이밍 기어 시장이 활기를 띠고 있습니다.” 한 PC 주변기기 업체 관계자의 말이다. 게이밍 기어란 게임에 특화된 장비를 부르는 말이다. 신발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축구에 적합한 축구화가 따로 있는 것과 같다.

예컨대 게이밍 마우스는 고사양 센서를 탑재해 신속하고 정밀한 컨트롤을 가능하게 해준다. 버튼도 여럿 달려 있어 게임에서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 게이밍 노트북에는 3D게임 구동에 필수적인 스펙이 뛰어난 최신 그래픽카드가 달려 있는 식이다.

게이밍 마우스나 게이밍 노트북은 물론 게이밍 헤드셋, 게이밍 체어, 게이밍 키보드 등이 있다. 로지텍, 레이저, 스틸시리즈, 조위기어, 커세어 등이 주요 브랜드다. 제닉스, 맥스틸, 앱코, 한성컴퓨터와 같은 토종 브랜드도 존재한다.

 
 

게이밍 기어 시장은 단지 오버워치 덕이라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성장세가 분명하다. 옥션에 따르면 최근 3개월(2016년 12월 9일~2017년 3월 8일) 기준 게이밍 마우스 판매량이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 970% 증가했다. 기계식 키보드는 78%, 게이밍 헤드셋은 375% 더 팔렸다. 게이밍 노트북도 15% 증가하며 상승세를 보였다.

가격비교 사이트 에누리닷컴 자료에서도 같은 흐름을 볼 수 있다. 올해 1~2월 게이밍 마우스 주문 수가 전년 동기 대비 61% 증가했다. 이 기간 전체 마우스 주문 수가 13.3% 감소한 것과 대비된다. 게이밍 키보드는 같은 기간 15.2% 상승했다. 키보드 전체는 11.9% 덜 팔린 것으로 조사됐다.

시장조사업체 존페디리서치(JPR)에 따르면 지난해 글로벌 PC 게이밍 하드웨어 시장 규모는 사상 최초로 300억달러대에 들어섰다. 전년(215억달러) 대비 39.5% 성장한 수치다. JPR은 이 시장이 2019년까지 연평균 6%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게이밍 기어 잠재수요자? 아직 충분”

현존 최상위 게이밍 마우스로 불리는 제품이 있다. ‘로지텍 G900’이라는 마우스다. PC 주변기기 글로벌 리딩회사인 로지텍은 게이밍 기어 부문에서도 단연 앞서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회사의 게이밍 카테고리는 지난해 10~12월 기준 전분기 대비 39% 성장했다. 전체 매출에서 게이밍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16%다.

“로지텍은 게임을 좋아하지만 게이밍 기어를 사용하지 않는 유저를 타깃으로 지난해 프로디지 시리즈를 출시했어요. 이 시리즈가 매우 좋은 성과를 보였는데, 이는 새로운 유저를 시장으로 유입시켰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정철교 로지텍코리아 지사장의 설명이다.

그는 게이밍 기어 시장의 미래를 낙관했다. “수많은 게임인구 중에는 게이밍 기어 잠재수요자가 있습니다. 지금은 일반 마우스·키보드를 사용하고 있지만 게이밍 기어로 바꾸려는 이들이 상당히 많죠. 이 수요는 점차 증가하는 추세고요.”

미국 게이밍 기어 브랜드 커세어 수석매니저 해리 버틀러도 시장의 잠재력을 높게 평가했다. “점점 많은 이들이 콘솔게임에서 PC게임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PC게이머의 연령이 높아지면서 경제력을 갖춘 차세대 유저로 새로 등장했습니다. 특히 한국에서는 PC게이밍이 자리를 잡았고, 계속 성장할 것이기 때문에 커세어는 한국 시장을 적극 공략하려고 합니다.”

덴마크 게이밍 브랜드 스틸시리즈는 특히 한국 시장의 잠재력에 주목하고 있다. “한국은 게임과 e스포츠를 구분해낸 최초의 국가입니다. 한국에서 게임은 취미는 물론 직업으로도 발전했죠. 스틸시리즈는 한국 시장에 전념 중입니다. 올해엔 우리 팬들과 더 긴밀한 관계를 맺기 위해 더 많은 ‘스틸시리즈PC방’을 오픈하고 게임대회와 이벤트를 개최할 예정입니다.” 토니 트루브리지 스틸시리즈 아시아마케팅 매니저의 말이다.

 

게이밍 노트북, 하락세인 PC시장 이끌다

게이밍 노트북 시장도 뜨겁다. 사실 노트북을 비롯한 PC시장은 꾸준히 하락세였다. 그런데 시장조사기관 IDC의 조사결과는 달랐다. 지난해 PC 출하량이 462만대로 전년 대비 3.2% 증가했다. 2012년 이후 매년 감소하다 지난해 반등했다. IDC는 울트라북(초슬림·초경량 노트북)과 게이밍 노트북 등이 성장을 견인했다고 분석했다.

올해 1월 미국에서 열린 가전박람회 CES 2017에서는 이 분야에 대한 시장 기대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삼성전자와 레노버는 각각 게이밍 노트북 브랜드인 오딧세이(Odyssey)와 리전(Legion)을 공개했다. 델과 MSI 등이 신제품을 공개한 가운데 에이서는 무려 9000달러짜리 게이밍 노트북 ‘프레데터 21X’를 선보여 화제를 모았다.

▲ 사진=이코노믹리뷰 노연주 기자

국내 대표 PC 브랜드 중 하나인 주연테크는 CES에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지난해 4분기 게이밍 기어 브랜드 ‘리오나인(Lionine)’을 론칭하고 게이밍 노트북과 주변기기를 출시했다. 허환석 주연테크 PC사업본부 이사에 따르면 노트북 하드웨어 성능 향상에 힘입어 게이밍 노트북 시장이 탄력을 받고 있다.

“게이밍 노트북이 최근 들어 출시된 것은 아닙니다. 수년 전에도 이미 나왔는데 그래픽 등 하드웨어 성능에서 일반 PC에 많이 밀리는 형세였죠. 최근 엔비디아 파스칼 아키텍처가 등장하면서 성능 격차가 10% 내외로 줄어들었습니다.”

허환석 이사는 시장변수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급작스런 수요 증가 이후 실제 게이머가 한정된 디스플레이 환경을 제공하는 노트북으로 즐기는 게이밍에 얼마나 만족할 것이냐가 향후 수요에 변수가 될 것입니다. 또 최근 호황은 오버워치라는 히트게임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따라서 이 시장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게임산업 발전이 필수입니다.”

 

카테고리 한정 짓지 말고 미래 게이밍 기어 선점해야

게이밍 기어 시장에 기회만 있는 건 아니다. 트렌드가 가성비(가격대비 성능비) 중심으로 흘러가면서 박리다매 시장으로 전락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독일 체리(Cherry)가 가지고 있던 기계식 키보드 특허가 만료돼 오테뮤, 카일 등 비교적 저렴한 키 스위치를 장착한 키보드가 꾸준히 출시되고 있습니다.” 에누리닷컴 관계자의 말이다.

이런 분위기는 게이밍 마우스 부문에서도 비슷하다. “게이밍 마우스 제품들 스펙이 대부분 비슷해졌습니다. 유저는 자신의 손에 맞는 그립감 좋은 제품을 선택하려고 합니다.” 한편으로는 성능이 상향평준화된 상황에서 게이밍 기어 브랜드들은 가격으로 경쟁하려 한다. 박리다매 시장으로 흘러가려는 조짐으로 보인다.

한 업계 관계자는 게이밍 기어 시장에서 기회를 엿보려면 카테고리를 한정 짓지 말아야 한다고 얘기했다. 예컨대 가상현실(VR) 게이밍 시대가 오면 새로운 게이밍 기어 시장이 열릴 것이니 선점전략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게이밍 기어의 미래를 선점하기 위한 관점의 확장이 요구되는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