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저의 일상과 가젯(Gadget)에 얽힌 그렇고 그런 이야기. 일상가젯 1화.

좀비처럼 기사 쓰다 고개를 떨군다. 살짝 눈을 마주친다. 내 기계식키보드가 얼굴을 붉힌다. 빨간색 LED 백라이트가 매력인 녀석이다. 커세어 제품인데 조금 모순인 구석이 있다. 여느 기계식키보드처럼 타닥타닥 소릴 내지 않는다. 소곤소곤이란 말이 어울린다. 이 키보드를 들이고서 날 째려보는 회사사람이 없어졌다. 대개 사람들은 게임하려고 기계식키보드를 산다. 휘황찬란한 RGB 백라이트가 달린 제품이 많은 건 우연이 아니다. 게이머 감성을 담아내려는 시도다. 난 게임이 아니라 업무에 기계식키보드를 쓴다.

▲ 커세어 스트레이프 MX 사일런트. 사진=이코노믹리뷰 노연주 기자

2015년 11월경이었을 거다. 게임박람회 지스타를 취재하러 부산엘 갔다. 바글바글한 게이머들과 몸을 비비며 행사장 여기저길 들쑤시고 다녔다. 그러다 한성컴퓨터 부스를 들렀다. 기계식키보드가 부스 사방에 가득했다. 하나하나 타건하며 느껴봤다. 부스 도우미가 내게 속삭였다. “현장에서 할인판매 중이에요.” 이미 취재는 뒷전이었다. 프레스 명찰을 감추고 소비자로 돌변했다. 고르고 고른 제품이 ‘‘GTune MKL31’이었다. 숫자패드가 없는 텐키리스 타입이다. 무지개빛 LED 백라이트는 정말 취향이 아니었다. 그걸 껐더니 심플한 올화이트 키보드로 변신했다. “카드도 되죠?”

부산에서 모셔온 키보드는 사무실에서 쓰기로 했다. 거짓말은 보태지 않겠다. 기사가 술술 써졌다. 기계식키보드가 생산성 도구였다. 갈축 스위치를 탑재한 제품이라 소음도 적당했다. 적어도 내 귀에는. PC방에 있는 기계식키보드는 대개 청축 제품이다. 타닥타닥 경쾌한 소리가 난다. 이걸로 게임을 하다보면 절로 흥이 솟구친다. 사무실에서 사용하기엔 너무 시끄럽다. 반면 내 키보드는 도각도각 우아한 소리를 낸다. 착각이었을까. 여론이 나빴다. 하루는 선배가 이랬다. “사무실에서 너만 일하는 거 티내냐?” 다른 선배도 말을 보탰다. “불만 있냐?” 시무룩한 마음으로도 꿋꿋하게 타이핑을 했다.

식물도 자신이 미움받는 걸 안다는 얘기가 있다. 내 기계식키보드도 핍박받았기 때문일까. 1년이란 시간도 못채우고 골골대기 시작했다. 시프트(SHIFT)나 컨트롤(CTRL) 같은 몇몇 키가 안 먹었다. 심지어는 무지개빛 백라이트가 꺼지지 않는 데 이르렀다. 이게 치명적이었다. ‘우리가 헤어질 시간인 거니.’ 이별을 직감했다.

다시 11월이 왔다. 지스타의 계절. 이번엔 대놓고 소비자의 눈빛으로 출장을 떠났다.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한성컴퓨터 부스를 찾았더니 없었다. 아쉬웠지만 앱코나 제닉스 부스가 있어 다행이었다. 그 주변에서 한참을 어슬렁거렸다. 눈에 들어온 키보드 하나가 있었다. 앱코의 ‘HACKER K585’. 68키짜리 컴팩트한 키보드다. 백라이트를 굳이 끌 필요가 없다. 영롱한 화이트 백라이트가 매력이니까. 지갑을 열기 전에 하나 걸리는 게 있었다. 청축 스위치 빼곤 다 품절이었다. 이미 마음은 K585 유저였던 까닭에 눈을 질끈 감았다. “카드도 되죠?”

▲ 앱코 K585. 사진=이코노믹리뷰 조재성 기자

나쁜 예감을 틀린 적이 없다고들 하지 않던가. 사무실을 타닥타닥 소리로 채워버리자 서늘한 시선이 따라붙었다. 더 이상 꿋꿋하게 버틸 수 없었다. 그러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새 키보드가 있었으니. 앞에서 언급한 커세어의 기계식키보드다. 정확히는 ‘커세어 스트레이프 MX 사일런트’다. 체리 MX 사일런트 스위치를 탑재한 소음방지 제품이다. 아무리 과격하게 타이핑해도 조용하다. 일반 멤브레인 키보드보다도 목소리가 작다. 이젠 “그럴거면 기계식키보드를 왜 쓰냐”고들 한다. 치는 맛이 다르다고 둘러대지만 나도 모르겠다. 물론 시끄럽다는 민원은 아예 사라졌다. 심지어 지금은 게이밍 마우스(로지텍 G302)까지 사무실로 불러들였다. 컴퓨터에 게임만 깔고 기사쓰는 눈빛으로 몰래 즐기면 딱이지 않겠나.

후배가 장비들에 눈길을 주면 괜히 사족을 붙이곤 한다. “기계식키보드랑 게이밍 마우스를 써봐. 기사가 잘 써진다고. 야마 에임이 좋아져.” 에임이 좋다는 말은 FPS(1인칭 슈팅게임) 유저들 사이에서 자주 쓰는 말이다. ‘목표물 조준 실력이 좋다’ 정도의 뜻이다. 야마는? 사전에도 나온다. “기자들의 은어로 ‘기사의 주제나 핵심’을 이르는 말”이라고. 애석하게도 내 게이밍 기어들은 동물원에 갇힌 동물 신세와 다를 게 없다. 뭐 아무렴 어떤가. 게이밍만을 위한 기계식키보드는 없다. 내겐 생업도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