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삼성 비자금 사건이 터졌을 당시 저는 데스크의 지시를 받아 리움 미술관으로 급파(?) 됐습니다. 경호원과 기자들 수십 명이 북적이는 상황에서 비자금 창구 중 하나로 부상한 '행복한 눈물'이 이동하는데, 어디로 가는지 취재하라는 특명이었어요. 당시 팀장은 저에게 "김용철 변호사 밀착마크보다 편할 것"이라며 "행복한 눈물이 어디로 가는지 파악하지 못하면 너가 행복한 눈물을 흘릴 줄 알아라"라는 명언을 남겼어요.

 

처음에는 좋았습니다.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 비자금 사건을 폭로한 후 그를 며칠간 스토커처럼 다니면서 뜨거운 취재경쟁에 휘말려 깨먹은 카메라만 두 대. 오랜만에 상황만 보면서 미술관을 취재하라고 하니 미소가 멈추지 않더군요.

하지만 이러한 제 기대는 현장의 날카로운 분위기와 더불어, "행복한 눈물을 언론에 5분간 공개할테니 소수의 기자들만 들어오세요"라는 현장 직원의 말에 산산히 깨졌습니다. 왜냐고요? 현장에 대거 몰린 기자들은 장소의 협소함이나 기타 등등의 이유로 소위 '풀단'을 짜서 취재를 하는데, 그 풀단에 제가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평소라면 경사스러운 일이지만 너무 부담스러웠습니다. 무려 600억원. 만약 촬영하다가 그림에 상처라도 나면 저는 3대를 이어 리움의 노예가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사진기자 몇몇과 미술관에 들어갔습니다. 다행히(?) 그림에 가깝게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데스크가 '왜 이렇게 멀리서 찍었어!'라고 호통을 쳐도 변명할 거리는 생겼네요. 그렇게 그림을 제 눈으로 보고, 촬영을 하고, 현장 분위기를 취재했습니다. 5분이 약간 길었어요.

어찌어찌 어안이 벙벙한 상태에서 미술관을 나와 취재물을 멍하니 보고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600억원에 달하는 미술품을 관리한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어떤 사람들이 이런 그림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잡념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어느새 행복한 눈물 그림을 실은 차량의 시동소리가 날카롭게 제 귀에 파고들었거든요. "어, 어, 간다! 간다!"

재계와 미술계의 인연
재계와 미술계는 상호보완적 관계입니다. 다만 기업은 사회공헌의 의미로 미술계를 지원하지만, 간혹 음성적인 비자금의 유통 경로로 활용하기도 합니다. 영화 '조선명탐정 1편'에는 막대한 세곡을 빼돌리는 집단이 미술품으로 비자금을 마련하는 장면이 나오지요. 맞습니다. 빛과 그림자가 있지요.

하지만 대부분은 사회공헌의 의미가 강한 것이 사실입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곳은 삼성입니다. 삼성문화재단은 1965년 이병철 창업주가 설립했으며 호암미술관, 플라토 등을 운영하고 있어요. 그리고 미술계의 거장이자 큰 손인 홍라희 관장이 삼성미술관 리움과 호암미술관을 맡고 있지요.

삼성에 있어 삼성문화재단에서 시작된 사회공헌의 이미지가 호암미술관 및 리움으로 이어지는 대목이 중요합니다. 우선 삼성문화재단은 저소득층 가정을 위한 의료 서비스가 중심인 삼성생명공익재단과 함께 삼성의 사회공헌 양대산맥으로 여겨집니다. 삼성문화재단의 경우 이병철 창업주가 직접 설립했고, 삼성생명공익재단은 1982년 5월 동방사회복지재단으로 설립되어 1991년 현재의 이름으로 변경됐으며 삼성서울병원과 삼성노블카운티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재계에서는 삼성문화재단과 삼성생명공익재단의 큰 그림이 삼성 전체의 방향성과 연결되어 있다고 믿습니다. 왜냐? 양 재단의 시작이 삼성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재단 이사장 자리는 대대로 오너 일가의 총수가 맡았기 때문입니다. 지난 2015년 이재용 부회장이 이건희 부회장이 맡고 있던 양 재단의 이사장 자리에 오르자 재계에서 "승계 일정이 빨라지고 있다"는 평가를 내린 이유입니다.

이재용 부회장의 어머니인 홍라희 관장은 양 재단에서 시작된 삼성의 상징적 영혼이 미술계로 흘러드는 최전선인 삼성미술관 리움과 호암미술관의 관장을 맡아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미술잡지 아트프라이스 등이 선정하는 '한국미술계를 움직이는 대표적 인물' 설문조사에서 홍라희 관장은 2005년 이후 거의 1위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미술품을 보는 안목이 뛰어나 홍라희 관장이 구입한 작품은 당장 가격이 뛴다는 속설이 있을 지경이에요.

재미있는 일화도 있습니다. 미술품에 조예가 깊었던 시아버지 이병철 창업주는 매일 홍라희 관장에서 10만원을 주며 '골동품을 사오라'는 특명을 내렸다고 합니다. 이러한 '수련'이 홍라희 관장의 미술품에 대한 안목을 길러주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참고로 삼성미술관 리움은 삼성 일가의 성 '리'(Lee)와 미술관(Museum)의 어미인 '움'(um)을 조합해 만들었으며, 2004년 개관했습니다. 당시 홍라희 관장은 개관식에서 "훌륭한 건축물 속에서 빛을 발하는 리움의 소장품들은 하나하나가 보석"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 리움. 출처=홈페이지

하지만 부침도 있습니다. 홍라희 여사는 2007년 삼성 비자금 사건이 터지고 이건희 회장이 그룹 회장에서 물러나자 자신도 리움 관장직에서 물러난 적이 있습니다. 이후 2년9개월만인 2011년 다시 관장으로 복귀해 미술계에 전력했으나 6일 또 사퇴를 발표했습니다. 일신상의 이유라는 설명이지만 재계 일각에서는 아들인 이재용 부회장이 최순실 사건에 휘말려 구속수사를 받은 것이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다.

SK도 미술계에 대한 사랑이 유명합니다. 최태원 SK 회장의 어머니인 박계희 여사는 아트센터 나비의 전신인 워커힐미술관 관장으로 활동하며 당시 미술계에 큰 족적을 남겼어요. 더 대단한 것은 1984년 처음 워커힐미술관이 열릴 당시 전시된 품목은 대부분 박계희 여사의 소장품이었다는 것. 국내 사립 미술관에서 쉽게 볼 수 없는 해외 유명 아티스트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어 신선한 충격을 안기기도 했습니다.

워커힐미술관은 2000년 종로구 서린동 SK사옥으로 이동하며 미디어 아트의 성격으로 변신을 시도합니다. 박계희 여사의 뒤를 이어 노소영 현 관장이 전권을 잡았어요. 시어머니의 손때가 묻은 사업을 며느리가 받은 케이스. 2002년부터 모바일 미디어를 활용한 예술품들을 선보였으며 아티스트를 위한 다양한 강연과 워크숍을 여는 등, 미술계에 엄청난 기여를 했습니다. 심지어 노소영 관장은 인공지능 시대를 맞아 미술계가 나아가야 할 방안을 진지하게 공론화 시키는 등, 그 자체로 매력적인 행보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신세계의 이명희 회장도 신세계갤러리를 통해 국내 미술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최근 갑질 논란으로 이미지가 다소 망가졌으나 대림산업의 이해욱 부회장도 대림미술관 관장으로 재직하며 나름의 행보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국내 최초의 사진 전문관으로 명성을 떨치며 다양한 디자인 예술의 온실이 되었어요. 일명 신정아 게이트로 유명세를 치뤘던 쌍용그룹 창업주 성곡 김성곤을 기념한 성곡미술관도 나름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빛과 그림자
중세 이탈리아의 예술가들은 당대의 권력자인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아 르네상스의 빛을 밝혔습니다. 미술을 넘어 조각, 문학, 심지어 현대미술에 근접한 새로운 가능성까지 메디치의 품에서 탄생했지요. 메디치 가문이 없었다면 우리는 현재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보티첼리와 같은 당대의 명장이 남긴 예술품을 감상할 수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메디치 가문은 순수하게 예술에 대한 열망으로만 예술가들을 지원한 것이 아닙니다. 이들을 일종의 선전전의 도구로 활용하며 메디이 치문의 위상을 높이는데 적극적으로 활용했어요. 대국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대항해시대, 유럽 각국의 절대왕정도 비슷한 이유로 예술가들을 지원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최근 미술품들을 비자금의 통로로 활용하는 현재 대한민국 재벌가의 행태와 닮았습니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성모와 대천사 가브리엘. 출처=픽사베이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후원이 있었기에 우리가 예술의 이름으로 인류역사의 정신적 진보를 끌어낼 수 있었다는 겁니다. 일각에서 자행되는 불편한 사건에 적극적인 단죄의지를 펴면서도, 기본적인 인류공헌의 가치마저 폄하하면 곤란한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