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가 로마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그린 세계 최대의 벽화

“우리는 신과 같아서, 신의 일에도 곧 익숙해질 것이다.”

미래학자 스트워트 브랜드가 1968년에 ‘지구 백과’(Whole Earth Catalog) 초판 서문에서 한말이다. 당시만 해도 이 말은 농담처럼 들렸다. 그러나 거의 50년이 흐른 지금, 이 말은 결코 농담이 아니게 되었다고  워싱턴 포스트가 20일 전했다.  

지난 30일을 돌이켜보라. 예측하지 못한 사건도 더러 있었지만, 신이 우리 운명을 통제하는가에 대한 과학적 탐구 측면에서 보면, 결과론적인 흐름이었을 것이다. 전미 과학 학술원(National Academy of Sciences)과 전미 의학 학술원(National Academy of Medicine)은 지난 주, 후손에게 유전될 수 있는 변화를 만들어 내기 위해 정자와 난자의 조작을 허용하는 인간 유전자 교정에 관한 보고서를 발간했다. 지난 1월에 과학자들은 처음으로 반은 돼지고 반은 인간인 괴물을 배양시켰는데, 이는 이종(移種)간 이식을 위해 인간 장기 기능을 하는 동물 배아 개발을 향한 첫 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테슬라의 엘런 머스크가 지난 달 두뇌와 컴퓨터 간의 인터페이스 개발에 큰 진전을 이루었다고 시사했듯이, 주사 투입이 가능한 전자 기술(injectable electronics)과 또 다른 형태의 인간 증강(human augmentation)이, 인간이 빠르게 진화하는 인공 지능을 따라잡기 위한 방편으로서 토론의 메인 스트림에 들어선 것은 확실하다.

우리 손 안에 있는 통제의 잠재력은 “신의 역할”이라는 생각을, 그저 교만한 비유 그 이상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질문에 대한 우리의 판단을 조심스럽게 보지 않을 수 없다. 기술이 거침없이 발전함에 따라, 이제는 우리 감각에 의존하기 보다는, 그런 기술의 잠재력과 규제에 관한 활발한 공개 토론에 참여해야 한다. 지금 바로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 우리가 결정하는 방법, 우리가 해결책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제대로 살펴 볼 때가 된 것이다.

예를 들어, 유전자 교정기술인 CRISPR에 관한 토론의 대부분은 우리가 무엇을 조작할 수 있고 그 변화가 얼마나 멀리 미칠 수 있는지와 관련되어 있다. 전미 과학 학술원의 최근 충고는 이 기술이 “중대한 질병이나 장애”를 치료하거나 예방하는데 국한해 사용되도록 허용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 질병인가? 청각 장애나 자폐 같은 특정한 특성들은 (질병이 아닌) 정상적인 변이이며 그 자체로 가치 있는 다양성이라고 간주되어야 한단 말인가? 완벽한 것만이 바람직한 것이라는 개념을 계속 조성한다면 결국 사회는 크게 변할 것이다. 우리가 신의 역할을 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그 역할을 맡았을 때의 결과를 예측할 능력이 우리에겐 없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고민해야 할 첫 번째 고민이다. 우리는, 질병을 “해결”하는 것이 인간 능력을 보다 전반적으로 드높이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빠르게 지나쳐 버릴 것이다.

한 저명한 과학자는 질병 치료를 위한 유전자 교정을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을 “미끄러운 경사에서 아무 것도 미끄러지지 않게 양면 접착 테이프를 붙이는 것”이라고 불안한 은유로 설명했다. 우리가 발전해 나갈수록, 현 시대에서 무엇이 소중히 여겨지고, 어떤 불평등이 영원히 기억될 것인가? 인간 존엄성은 어디에서 모습을 드러낼 것인가? 다음 세대의 자율성은? 우리가 의도하지 않은 미래의 피해를 어떻게 완화할 수 있단 말인가?

아마도 이런 것들은 신에 대한 질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신이 될 수 있을까? 우선 우리는 우리가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개별적 존재로서 우리에게는, 비록 총명한 사람이라도, 신에게서 보기를 바라는 속성, 즉 전능함, 자비심, 예지력, 현세의 결점투성이 생각에 속박되지 않은 세계관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지역 사회, 전통, 역사와 같은 다른 지식을 가지고 있고, 이 지식이 철학적으로나 종교적인 지침이 된다. 미신이나 두려움에 기초한 이러한 지혜를 재빨리 떨쳐버리는 사람들은, 무조건 미리 포기하기 보다는, 이제 마지막으로 과거와 현재에게 대화를 시도해 봐야할 때이다.

그 대화는 어떤 대화가 될까? 이상적으로라면, 그 대화는 이념적으로 다양한 대화가 될 것이며 다양한 동기를 지닌 광범위한 요소들을 끌어낼 것이다. 또 우리의 새 대통령(도널드 트럼프)이 지적했듯이, 국립 인문 기금(National Endowment for Humanities) 같은 단체로부터의 자금 지원을 줄인다 해도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사회의 모든 대화자들, 즉 종교 지도자들과 토론하는 과학자들, 그리고 토론에 참여한 역사가, 정치가, 대중들과 대화하는 윤리학자들로부터는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신이 아니다. 그러나 어떻게든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이 잘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