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PG(역할수행게임) 왕국에서 샌드박스게임이라는 다크호스가 고개를 들고 있다. 국내 주요 게임사가 샌드박스게임 준비 소식을 전해온다. 자유도가 높은 샌드박스 장르는 유저의 선택을 중시하는 서구권에서 특히 인기가 많다. 서구권에서는 비주류로 통하는 RPG 대신 샌드박스게임으로 글로벌 시장을 공략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꺼져가는 게임한류 불씨를 살려내는 묘약이 될지 주목된다.

‘마인크래프트’부터 ‘GTA’까지…샌드박스게임의 힘

‘테라리아’라는 게임이 있다. 정해진 목표 없이 자유롭게 자원을 수집하고 집을 꾸미며 외부세계를 탐험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2D 도트 그래픽으로 구현된 이 게임은 단순해보이지만 자유도가 높아 창의적인 플레이가 가능하다. 경우의 수는 무궁무진하다. 북미 게임사 리로직이 만든 게임이다. 최근 누적 판매량 2000만장을 돌파했다. 이 숫자는 테라리아가 흥행게임이란 걸 알려준다.

테라리아는 샌드박스게임으로 분류된다. 게임 장르 중 하나인 샌드박스는 제법 포괄적인 개념이다. 이 장르 핵심은 높은 자유도와 창발적 플레이다. 대개 이런 게임은 유저한테 특정한 목표를 주지 않는다. 미션이 존재하더라도 최소한일 따름이다. 유저 마음대로 플레이할 수 있게 유도한다. 예를 들어 레고블록으로 상상하던 걸 만들어낼 수 있는 것과 같은 논리다. 그러다보니 개발자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창의적인 플레이가 이뤄진다.

▲ 출처=모장

무엇보다도 샌드박스는 잘 팔리는 장르다. 글로벌 메가히트 게임 목록을 살피면 쉽게 이 장르를 찾을 수 있다. 2011년 처음으로 등장한 ‘마인크래프트’가 대표적이다. 지난해 누적 판매량 1억건을 돌파한 타이틀이다. 5억건의 판매고에 근접한 ‘테트리스’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렸다.

파급력을 알아본 마이크로소프트(MS)는 2014년 이 게임 개발사 모장(Mojang)을 2조6000억원가량에 사들였다. 마인크래프트는 땅을 파고 나무를 캐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나만의 세계를 창조해낼 수 있는 게임이다. 수행해야 할 미션이 존재하지만 유저들은 이를 핵심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들은 무언가를 창조해 이리저리 퍼다나르며 자랑한다.

그랜드테프트오토(GTA) 시리즈 역시 샌드박스형 게임으로 볼 수 있다. 도시 전체가 무대인 오픈월드 게임이다. 극강의 자유도를 보장한다. 유저는 도시에서 사랑을 나누고 범죄를 저지르며 여행을 즐긴다. 시리즈 최신작인 GTA5는 출시 하루 만에 매출 8억달러(당시 기준 약 8670억원)를 기록했다. 매출 1조원을 돌파하기까지는 3일이면 충분했다.

이외에도 샌드박스게임으로 분류할 수 있는 글로벌 명작이 다수 존재한다. ‘울티마 온라인’, ‘엘더스크롤’ 시리즈, ‘문명’ 시리즈, ‘심시티’ 시리즈, ‘레고월드’ 등이다. 샌드박스게임 혹은 샌드박스 요소를 지닌 게임으로 불리는 게임들이다. 국내에서는 ‘아키에이지’나 ‘마비노기’ 등이 샌드박스게임의 묘미를 담아냈다는 평을 받는다.

▲ 출처=록스타게임즈

RPG 바깥으로 향하는 시선, 비전이냐 허상이냐

최근 국내 게임사 다수가 샌드박스게임을 응시하고 있다. 스마일게이트가 대표적이다. 일단 이번주 안에 소셜 샌드박스게임 ‘슈퍼탱크대작전’을 141개국에 출시할 예정이다. 각양각색 부품으로 나만의 탱크를 조립해 싸우는 게임이다. 부품조합에 따라 탱크를 만들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무한에 가깝다. 이 게임을 개발한 루미디아게임즈는 앞으로도 소셜 샌드박스게임을 개발해갈 계획이다.

스마일게이트는 모바일 RPG ‘러스티블러드’ 제작사인 유티플러스와도 PC온라인 샌드박스 게임을 개발 중이다. 아직 개발 초기단계라 정확한 출시일정은 미정이라는 설명이다. 아울러 영국 개발사 레디언트월드와 함께 ‘스카이사가’라는 또 하나의 샌드박스게임을 준비 중이다. 서구권에서 알파테스트를 진행한 단계다.

▲ 출처=스마일게이트

컴투스도 샌드박스게임에 야심을 보인다. 올해 하반기 출시를 목표로 ‘댄스빌’을 개발 중이다. 5년 이상 개발 중인 이 게임은 뮤직비디오를 제작하는 타이틀이다. 유저가 작곡은 물론 관절 하나하나까지 조절해 댄스모션을 만들어낼 수 있다. 자신만의 음악과 춤이 담긴 뮤직비디오를 만들어 유저들과 공유하는 게 핵심 재미요소다.

국내 최대 게임사인 넥슨도 움직이는 중이다.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개척형 오픈월드 MMORPG(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 ‘야생의 땅: 듀랑고’ 역시 샌드박스게임으로 분류된다. 유저는 공룡이 살아있는 과거로 돌아가 모험을 펼치며 생존해야 한다. 단순 사냥에서부터 사회건설까지 높은 자유도를 기반으로 플레이 가능하다. 지난달 3차 리미티드 베타 테스트를 마쳤다. 넥슨은 올해 안에 정식 출시를 목표로 하고 있다.

“북미시장 등 서구권에서는 마인크래프트와 같은 샌드박스게임이 엄청난 흥행을 거뒀다는 걸 확인 가능합니다. 국내 게임사들이 샌드박스게임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글로벌시장 공략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국내 유저만을 바라보고 준비 중인 건 아닙니다.” 업계관계자의 말이다.

▲ 출처=넥슨

국내 게임사들은 대부분 글로벌시장 공략에 관심이 많다. 국내 시장규모가 한정적인 탓이다. 세계시장으로부터 성장동력을 확보하겠다는 생각이다. 다만 성공사례가 손에 꼽힌다. 아시아권 일부국가에서 흥행한 사례는 제법 있지만 서구권에서는 이렇다 할 사례가 많지 않다. 주요시장에서 성공하지 못하면서 한국게임이 글로벌 주도권을 잃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서구권 공략 실패요인으로 여러 지적이 따른다. 하나의 키워드가 ‘RPG’다. 국내시장은 RPG 중심인데 서구권에서는 한국형 RPG가 비주류 장르인 탓에 개발사들이 이 간극에서 갈피를 못 잡고 있다는 얘기다. 일각에서는 장기를 살려 RPG로 정면승부를 펼쳐야 한다고 말한다. 한편에서는 샌드박스게임과 같은 서구권 선호장르를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샌드박스게임 도전이 흥행을 보장하진 않는다. 다른 업계관계자가 말했다. “샌드박스게임은 경우의 수가 많기 때문에 개발이 쉽지 않습니다. 업계가 모바일게임 중심 재편으로 개발인력이 파편화된 상태에서 볼륨이 큰 샌드박스게임을 만드는 건 어려운 도전입니다. 이 영역에서도 RPG 개발에서 보여준 강점을 보여줄 수 있을지도 미지수고요. 오픈월드 MMORPG처럼 RPG에 샌드박스게임의 요소를 더하는 방식이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