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의 게임 케릭터 슈퍼 마리오 피규어. 출처=Max Pixel

오래된 일본의 속담 중에는 이런 말이 있다. “おきて半畳, 寝て一畳(일어서면 다다미 반 장, 누우면 다다미 한 장)” 여기에는 사람이 살아 있을 때 필요한 공간은 돗자리 한 장이고 죽어서 누웠을 때 필요한 공간은 돗자리 한 장이면 충분하니, 필요 이상의 욕심을 부릴 필요가 없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 의미만으로도 충분한 교훈을 전달하지만 이 속담은 일본인들의 축소지향적 사고방식, 즉 미니멀리즘(Minimalism)적 관점을 잘 나타내는 구절이기도 하다. 이러한 일본 특유의 미니멀리즘은 최근 글로벌 트렌드와 맞닿아 있는 부분에서 그 가치를 재평가 받고 있다. 

일본의 미니멀리즘 

일본 전자기업 소니(SONY)의 황금기를 있게 한 소형 음향기기 워크맨(Walkman), 게임업체 닌텐도(Nintendo)사의 미니 게임기, 전 세계 수많은 마니아들을 보유한 일본 시계업체 카시오(CASIO)의 스포츠워치 G-shock 시리즈에, 그 이름에서부터 축소된 세계를 추구하는 포켓몬GO의 원작 IP ‘포켓몬스터’ 게임까지. 일련의 일본 제품들은 모두 ‘가능한 작은 공간, 작은 크기를 지향하면서도 될 건 다 된다’는 등의 공통점이 있다. 이 밖에도 일본에서 생산된 많은 제품과 콘텐츠들에는 축소를 통한 효율성을 지향하는 사고방식이 묻어나는 사례들이 많다. 많은 전문가들은 이러한 현상의 배경에는 일본의 지형적 특성, 역사적 배경이 영향을 받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도망치면 갈 곳이 없다? 

일본인들의 미니멀리즘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가를 연구하는 많은 이들이 공통적으로 언급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섬’이라는 국가의 지형적 특성이다. 인접한 모든 면이 바다로 막혀있기 때문에 국가 내에서 분쟁이 생기면 패배하는 쪽은 어디론가 도망칠 수 있는 곳이 없다. 물론 다른 국가 간 이동수단이 없던 먼 옛날의 이야기지만 이러한 조건은 비단 물리적인 것이 아닌 심리적 인 부분으로도 작용했다. 사면이 바다로 막혀있는 제한적 공간에서 추구해야 할 최고의 가치는 바로 ‘효율성’이었다. 같은 조건이라면 최소한의 공간에서 최대의 효과를 내는 생산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 일본식 오니기리. 출처= 픽사베이

일본식 미니멀리즘의 절정, 식문화-피규어-의류  

흔히 ‘아기자기함’과 ‘정갈함’ 등으로 설명되는 일본의 음식들은 미니멀리즘의 절정을 보여준다. 대표적으로 일본식 도시락(弁当, べんとう)이 있다. 흔히 작은 나무 상자에 한 끼에 먹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식품들을 담아내는데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 상차림이 없어도 된다는 점과 짧은 시간에 식사를 마칠 수 있다는 효율성이 강조된 식품이다. 우리나라에는 삼각김밥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일본의 전통음식 오니기리(おにぎり)도 포장만 뜯고 바로 먹으면 한 끼의 식사가 되는, 시간 단축, 공간 축소의 효율성을 극대화한 식품이다. 이 외에도 특히 일본의 식품시장에서 가장 발달한 모습을 보여주는 다양한 형태의 HMR(즉석식품)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2015년 일본 아오모리현(青森県) 소재 식품업체인 PEBORA 株式会社(페보라 주식회사)는 소용량 페트병에 담겨있는 씻겨진 쌀 ‘페트 보틀 라이스(Pet-Bottle Rice)’라는 제품을 선보였다. 이는 특히 1인 가구 소비자들에게 선풍적 인기를 끌며 출시 1년 만에 5만 개 이상 판매돼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그런가하면 ‘일본 특수 상품’이라고 불리는 피규어(Figure)-프라모델-인형도 일본의 미니멀리즘을 제대로 반영된 제품들이다. 피규어는 사람이나 동물 혹은 상상 속 존재를 축소시켜 만든 완성형 모형이고, 프라모델은 비행기나 로봇 따위를 일정 비율로 축소시켜 이를 직접 만들 수 있도록 한 모형이다. 크기는 작아도 모티브가 되는 원형의 디테일한 부분을 잘 살린 축소판이다. 애니메이션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콘텐츠를 원소스로 한 이 제품들은 최근에는 일본 내수를 넘어 해외로도 수출되는 등 시장을 확장하고 있다. 일본 야노경제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2015년 일본의 장난감(피규어-프라모델-인형)의 전체 시장규모는 약 710억엔(7000억원)으로 추산됐는데 여기에 해외로 수출되는 제품까지 포함하면 적어도 1000억엔(1조원) 이상의 경제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 주식화사 PEBORA의 페트병에 담긴 쌀, 출처= 株式会社 PEBORA 공식 홈페이지

의류 패션분야에서 일본식 미니멀리즘이 표출된 사례는 SPA 브랜드 유니클로(Uniqlo)다. 유니클로는 빠른 시간에 의류를 쇼핑할 수 있는 매장을 표방한다. 유니클로 매장 한 곳에서는 남녀의 속옷보터 양말, 상·하의를 포함한 거의 모든 의류를 판매한다. 굳이 여러 곳의 매장에 들르지 않아도 원하는 모든 의류를 구매할 수 있다. 아울러 유니클로의 매장은 효율적인 공간배치를 통해 제품 디스플레이(진열)공간과 재고 적재 공간 배분의 최적화를 이뤄냈다. 이러한 방식은 다른 나라의 SPA 브랜드 매장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한편, 우리나라 및 전 세계 주택 시장에서 인기를 끌었던 협소주택(狹小住宅)도 원래는 비싼 택지비용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일본 건축업계에서 가장 처음 제시한 개념으로 알려져 있다. 

‘의도하지 않게’ 글로벌 트렌드와 접점을 찾다         

글로벌 시장에서 정보와 콘텐츠의 이동이 초를 다투는 속도로 빨라지면서 이전보다 더 중요하게 떠오른 가치들 중 하나가 바로 효율성이다. 가능하면 짧은 시간에 원하는 가치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혹은 물리적 공간에 있어서도 넓은 것을 고집하기보다는 필요한 만큼의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을 우선시한다. 이러한 흐름들은 일본의 효율적 미니멀리즘 문화와 다양한 교집합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전적으로 시대상의 변화가 부합하는 부분이 어쩌다가 맞아떨어진 것이지 일본인들이 의도한 결과는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제한적 조건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한 가지 방편으로 미니멀리즘을 택했다.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자신들이 가진 강점들을 적절한 시기에 제품과 콘텐츠로 특화시킨 아이디어다.

문학평론가 이어령 교수는 자신의 저서 <축소지향의 일본인>을 통해 “일본이 경제 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그들의 문화 속에 내재된 ‘축소지향성’ 때문”이라고 말했다. 

고유의 민족성이든, 작은 아이디어든, 적절한 시기에 자신들이 가진 특성들을 강점으로 삼고 세계의 트렌드에 살포시 올려놓는 일본의 ‘눈치’는 글로벌 경쟁력 강화를 꿈꾸는 우리 기업들이 깊게 연구하고 분석해야 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