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제로레이팅(Zero Rating) 정책을 강하게 추진하며 글로벌 통신업계는 물론 ICT 업계 전체가 술렁이는 분위기다. 망을 중심으로 네트워크에 집중했던 통신사들 입장에서는 운신의 폭이 넓어지는 한편, 플랫폼 사업을 추구하며 모바일 이상의 초연결 시대를 노리던 ICT 업계는 바짝 긴장하는 분위기다.

이러한 변화는 망 중립성(net neutrality) 논쟁으로 불거지는 한편 실리콘밸리와 트럼프 행정부의 긴장관계, 나아가 미디어 산업은 물론 산업 패러다임에도 일정정도 영향을 줄 전망이다.

▲ 출처-위키미디어

FCC 아짓 파이 전면에...제로레이팅 사실상 '허용'
톰 휠러의 뒤를 이어 미국 FCC 위원장으로 임명된 아짓 파이가 최근 통신사의 제로레이팅에 대한 조사를 중단하며, 사실상 이를 허용하는 정책적 방향을 잡아 눈길을 끈다. 지난해 FCC 주도로 진행되던 제로레이팅 전수조사를 중단시킨 상황에서 통신사들의 전격전을 허용한 셈이다. 제로레이팅은 통신 사업자가 특정 서비스에 이용되는 서비스에 데이터 요금을 부과하지 않는 방식이다.

아짓 파이가 이끄는 FCC가 사실상 오바마 행정부의 정책기조에 반하는 제로레이팅 허용이라는 카드를 꺼내자, 당장 통신사들은 기다렸다는듯 전쟁에 돌입했다. 3위 사업자인 T모바일이 제로레이팅 서비스 가능성을 시사한 가운데 1위 사업자 버라이즌도 13일부터 모든 고객에게 한 달 80달러를 내면 데이터를 무제한으로 사용할 수 있게 만드는 요금제도를 실시한다고 밝혔다. 2위 사업자인 AT&T도 비슷한 요금제를 출시하며 맞불을 놨다.

제로레이팅은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까? 이용자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다. 더버지는 17일 "시장경제체제에서 경쟁은 소비자에게 다양한 선택지를 줄 수 있으며, 경쟁은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평가했다. 제로레이팅의 등장은 음성에서 데이터로 빠르게 재편되는 최신 통신업계의 트렌드를 반영할 수 있으며, 나아가 소비자에게 질높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 아짓 파이. 출처-위키미디어

그렇다면 통신 사업자에게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출혈경쟁으로 힘든 나날을 보낼까? 망 설비 및 유지비용을 고려하면 통신사들에게 제로레이팅은 얼핏 재앙으로 비춰질 수 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꽃놀이패다. 제로레이팅 자체가 통신사의 외연적 확장을 가능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참고로 아짓 파이 FCC 위원장은 한 때 통신사에서 일해던 인물이다.)

통신사의 현재 상황을 살필 필요가 있다. 원론적으로 통신사는 국가 기간 인프라로 작동한다. 국민의 재산인 주파수를 정부로부터 고가에 임대해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사업을 펼치는 개념이다. 당연히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진흥과 규제에 있어 신중한 행보를 보이기 마련이다. 이러한 정체성으로 인해 통신사들을 일종의 '카르텔'로 묶는 시각도 있다. 국내의 경우에도 번번히 제4 이통사 출범이 좌초되는 이유를 두고 다양한 배경을 거론하고 있지만, 통신사의 견고한 카르텔에서도 이유를 찾는 목소리도 있다.

3G 시절까지 통신사들은 국가의 보호를 배경으로, 육성 및 규제의 선을 아슬아슬하게 타며 발전을 거듭해 왔다. 원초적인 플랫폼 사업자로서 통신사들은 모든 ICT 인프라의 중심에 있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모바일 시대가 시작되며 통신사들의 지위는 크게 휘청이기에 이른다.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원초적인 플랫폼을 제공하며 '통행료'를 받아 몸집을 불렸지만, 다양한 ICT 기업들이 통신사의 플랫폼에 새로운 사용자 경험을 제공하는 플랫폼을 덧대며 상황이 미묘해졌기 때문이다.

네이버와 카카오 및 페이스북 등 현존하는 대부분의 ICT 기업들은 당연하지만 통신사의 망을 중심으로 사업을 전개한다. 그리고 모바일 시대는 이들 2차 플랫폼 사업자들의 손에서 만개하기 시작했다. 통신사들이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힘들여 고속도로를 개통했는데 막상 돈을 버는 곳은 휴게소가 된 상황과 비슷하다. 초연결 시대, 통신사의 위기를 거론하는 이유다.

하지만 통신사들도 넋놓고 당하지는 않았다. 당장 국내의 SK텔레콤 및 KT, LG유플러스는 사업 다각화를 통해 ICT 기업이 창출하는 2차 플랫폼 사용자 경험을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실험을 시작한 바 있다. KT와 LG유플러스가 밀고있는 협대역 사물인터넷(NB-IoT)과 SK텔레콤이 추구하는 로라망을 중심으로 4G 이상의 미래에 기본적인 대응카드를 꺼내는 상황에서 사물인터넷을 위해 제조사들을 모집, 자체적인 생태계를 조성하는가 하면 IPTV 등 다양한 사업적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제로레이팅 이슈로 돌아가면 두 가지 화두를 발견할 수 있다. 바로 망 중립성과 미디어 전쟁이다.

먼저 망 중립성. 사실 제로레이팅과 망 중립성은 뚜렷한 교집합이 없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망 중립성은 제로레이팅과 사안이 약간 다르다. 망 중립성은 통신사가 주로 ICT 기업 서비스에 대해 차별적 대응을 하지 못하는 개념이지만 제로레이팅은 서비스 품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소비자의 혜택에 집중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로레이팅이 망 중립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개념은 성립된다. 고차원적인 방법론에 대한 이야기며, 제로레이팅과 같은 방식이 망 중립성 '논쟁'에 일정정도 영향을 미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쉽게 말하자면 통신 서비스의 조절이라는 원론적인 방식인 제로레이팅을 통신사가 허용하는 개념 자체가 망 중립성에 위배된다는 뜻이다.

결국 제로레이팅이 트렌드로 고착화되면 망 중립성은 크게 침해될 전망이다. 어떤일이 벌어질까? ICT 기업 입장에서는 재앙이다. 국내에서 벌어졌던 통신사와 카카오, 통신사와 삼성전자 스마트TV 분쟁을 예로 들자면, 망 중립성이 지켜지지 않는다는 전제로 최종승자는 모두 통신사가 되기 때문이다. 지난 1월26일 네이버는 지난해 4분기 실적발표 컨퍼런스 콜에서 망 중립성 논쟁에 대해 "당장 큰 영향은 없을 것"이라면서도 "망 중립성 정책을 예의주시하고 있다"며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했다.

제로레이팅에서 시작된 날개짓이 망 중립성 논쟁으로 번지면, '통신사의 실제적인 서비스 경쟁력 강화'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도 발견할 수 있다. 미국의 AT&T가 자신들이 인수한 디렉TV나우 서비스에 대해 제로레이팅을 적용한 지점이 의미심장하다. 통신사가 제로레이팅을 무기로 자신들의 부가 서비스에 대한 시장 지배력 강화에 나설 수 있다는 뜻이다.

국내도 이미 비슷한 트렌드가 감지된다. 지난해 KT가 당시 다음카카오와 협력해 다음카카오팩을 출시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KT 가입자의 경우 월 3300원만 추가로 내면 카카오의 대표 서비스를 3GB 내에서 추가 데이터 비용 없이 무료로 사용할 수 있게 만드는 서비스다. 당시 이러한 제로레이팅 이슈에 망 중립성 논쟁이 후끈 달아오르기도 했다.

특히 OTT 시장의 경우 '제로레이팅-망 중립성' 연결고리의 직격탄을 맞을 전망이다. 이미 국내 유료시장의 패권이 IPTV로 넘어간 상태에서 제로레이팅과 망 중립성 콜라보가 OTT 시장을 빠르게 장악할 경우, 그 후폭풍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AT&T가 디렉TV나우에 제로레이팅을 적용한 것이 넷플릭스를 견제하기 위함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망을 가진 통신사는 제로레이팅이라는 이슈를 통해 망 중립성을 파괴할 수 있는 '권능'을 보장받으며, 이를 바탕으로 OTT 산업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통신3사의 IPTV가 가입자에게 "모바일 TV를 보면 데이터 요금을 받지 않겠다"고 나서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미 자리를 잡은 OTT 사업자의 경우 일정정도 반격에 나설 수 있으나 군소 OTT 사업자들은 버티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시야를 더 확장하면 모바일 미디어 사업 전반에 거대한 폭풍이 몰아칠 소지도 있다.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비롯해 다수의 ICT 사업자들이 스트리밍 라이브 서비스를 통해 새로운 비전을 모색하는 상황에서, 통신사의 망 중립성 카드는 다양한 측면에서 '제어의 손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ICT 사업자에게는 고화질 동영상 제한을 거는 비디오 스로틀링 기능을 내밀고, 자사의 서비스에는 반대의 육성정책을 펼 개연성도 있다.

그렇다면 국내의 망 중립성 상황은 어떻게 돌아갈까? 2010년대 불거진 망 중립성 논쟁을 거치며 우리는 일단 '중립'의 기조가 강하다. 오바마 행정부의 FCC가 강조한 망 중립성 강화 분위기가 강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현행 전기통신사업법 제50조(금지행위)는 망 중립성 강화에 무게를 두고 있어도 위반사례에 대한 뚜렷한 법적근거가 없다. 방송통신위원회의 가이드 라인도 실제 현장에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이를 보완하고자 유승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해 9월 전기통신사업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하며 망 중립성 강화 기조를 추구하고 있다.

하지만 국내 정보통신 사업 트렌드가 미국의 분위기를 따라갔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실제로 유럽이 망 중립성 약화, 미국이 망 중립성 강화를 추구하던 상황에서 우리는 미국의 사례를 철저하게 따라갔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현지의 상황이 급변한 상태에서 국내도 어떤 돌발변수가 발생할 지 아무도 모른다.

제로레이팅에서 시작되는 망 중립성 논쟁이 통신 사업자를 넘어 다양한 ICT 사업 전반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최근 트럼프 행정부와 ICT 대표주자인 실리콘밸리의 신경전이 불거지는 현실적 대목도 눈길을 끈다. 망 중립성 약화가 핵심으로 부상하는 가운데 실리콘밸리가 트럼프 행정부와 일정정도 협상의 여지를 남길 수 있는 가능성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공장 이전문제와 부의 집중과 관련된 각자의 이해관계, 이민자와 관련된 행정명령과 소위 백도어 이슈 등 실리콘밸리와 트럼프 행정부의 감정의 골은 이미 깊어진 상황이다. 현실 정치적 차원의 문제가 요원하다는 점은 향후 제로레이팅 이슈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결국 어떤 방식으로 가든, 망 중립성 약화의 기조는 통신사의 입지를 크게 강화할 전망이다.

▲ 출처-위키미디어

실리콘밸리 힘의 균형...통신사 천하통일?
글로벌 통신사의 축제, MWC 2017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망 중립성 약화의 기조를 탄 유럽의 스페인에서 열리는 MWC는 대대로 모바일을 중심으로 삼는 통신사의 '위력'과 '비전'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이슈로 여겨져왔다.

메인 주제를 봐도 알 수 있다. 2013년 MWC는 "새로운 모바일의 지평(New Mobile Horizon)"을, 2015년 MWC는 "혁신의 최전선(Edge of Innovation)"을 내세웠다. 그리고 올해는 "모바일, 그 다음 요소(Mobile. The Next Element)"다. 지평을 열고 혁신의 최전선에 모바일 경쟁력을 올렸다면, 이제는 모바일 이후의 시대를 통신사 중심으로 구축하겠다는 야심이 드러난다.

올해 MWC 2017에서 마크 저커버그는 통신업계의 여유로운 환대에 어색한 미소를 머금을 수 있을까? 아니면 여전히 적대적인 경계감에 몸서리를 칠까? 지금까지 흘러가는 분위기만 보면 전자에 무게가 실린다. 다시, 통신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본격적인 모바일 플랫폼 시대를 넘어 초연결의 트레드로 모든 사람들의 관심이 옮겨가는 가운데, 기본적 네트워크의 시대가 다시 각광받는 아이러니한 현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