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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의 의외로 쓸모있는 개념어 사전] 드라마 <도깨비> 속 죽음과 삶
김영수 칼럼니스트  |  stels.lee@econovill.com  |  승인 2017.02.17  18:23:37

죽음(Death)

[명사] 생명활동이 정지되어 다시 원상태로 돌아오지 않는 생물의 상태로서 생(生)의 종말을 말함.

 

 
 

“이 삶이 상이라 생각한 적도 있으나 결국 나의 생은 벌이었다.” 드라마 <도깨비>에 나오는 김신(공유 분)의 말이다. 모함을 받아 억울하게 죽었다 다시 살아난 뒤 그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신에 가까운 존재가 되었다. 영생불멸이라니, 더할 나위 없는 행운 같지만 정작 그는 끝나지 않는 삶을 끔찍한 징벌로 받아들인다. 사랑했던 이들의 고통스러운 죽음을 기억하며 홀로 삶을 이어가는 걸 도무지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음의 문제는 그의 기구했던 삶만큼이나 쉽게 풀리지 않는다.

“죽음, 그 속에 숨어 있는 것은 베일을 벗기를 기다린다”고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노래했지만 저 베일을 벗긴 사람은 여태껏 없다. 살아 있는 한 인간은 죽음 자체를 경험할 수 없고, 죽음의 정체를 알 수도 없다. 기원전 3700년경 나온 인류 최초의 문학작품 메소포타미아의 서사시 ‘길가메시’ 역시 집요하게 죽음과 영생의 비밀을 파헤친다. 그러나 영웅적 모험의 결과 길가메시가 깨달은 건 죽음을 피할 길은 없다는 죽음의 절대성뿐이었다. 저 절대성이 우리가 죽음에 관해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사실이다.

트로이 전쟁에서 사망한 그리스의 영웅 아킬레우스는 하계로 찾아온 옛 동료 오뒤세우스에게 말한다. ‘모든 사자(死者)를 통치하는 왕이 되느니 차라리 지상에서 나는 농토도 없고, 재산도 많지 않은 가난한 사람 밑에서 머슴살이를 하면서 살아가고 싶다.’(호메로스, <오뒤세이아>) 아킬레우스뿐일까. 인류는 아주 오래 전부터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공포에 진저리쳤다. 똥을 좋아하는 이는 거의 없지만 그래도 죽는 것보다는 살아서 ‘개똥밭에 뒹구는 게 더 낫다’는 게 우리 대부분의 마음이다.

그렇다면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와 같이 있지 않고, 죽음이 올 때는 우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 죽음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죽음이 아니라 현재의 삶에 집중해 최대한 즐겁게 살고자 노력하라고 그는 충고한다. 플라톤에겐 죽음이야말로 영혼이 육체라는 감옥에서 해방되는 축하할 만한 일이었다.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에게 삶과 철학은 죽음을 위한 연습 과정이었다.

플라톤에게 삶이 죽음을 위한 것이었다면 하이데거에게는 죽음이 삶의 결정적 조건이 된다. 그가 보기에 상투적이고 천편일률적인 삶에 매몰된 인간이 진정한 삶으로 고개를 돌리는 유일한 순간은 근본적인 불안, 즉 죽음에 사로잡힌 때뿐이었다. 죽음과 진지하게 마주한 사람은 삶 앞에서도 진지해지기 마련이다. 그에게 삶을 삶답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죽음이었다.

이들의 가르침은 한결같다. 죽음을 두려워 말라. 죽음을 통해 삶을 돌아보고, 지금의 삶을 더욱 가치 있게 가꾸라. 저절로 숙연해지지만, 배부른 소리라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 같다. 한국의 자살률이 세계 1, 2위를 다툴 만큼 높다는 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죽기 아까울 정도로 삶이 즐겁고 소중하기는커녕 오히려 사는 게 죽는 것만도 못하다고 느끼는 이들이 우리 사회에는 그렇게나 많다.

고대 그리스의 시인 바퀼리데스는 “태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으며, 태어나자마자 가능한 한 빨리 죽는 것이 그 다음 좋다”고 비관했다. 가혹한 운명의 굴레에 빠진 햄릿은 ‘단 한 자루의 단칼이면 삶을 마감’하고 ‘죽음이라는 잠’에 빠져 안식할 수 있을 것이라고 탄식했다(<햄릿>). 죽음이 좋은 삶을 위한 성찰의 계기가 되려면 적어도 삶이 죽음보다 낫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죽음은 차라리 안락한 피난처가 되고, 삶에 모욕당한 많은 이들은 기꺼이 삶 대신 죽음을 택하곤 한다.

<도깨비>에는 죽음보다 못한 비참한 삶을 간신히 사는 이들, 혹은 죽은 후에도 한을 풀지 못해 구천을 떠도는 이들이 잔뜩 나온다. 드라마는 선량해서 그 비참한 삶과 슬픈 죽음을 깊이 연민하지만 더 나아가 죽음과 삶을 성찰하지는 못한다. 드라마를 탓할 일은 아니다. 단 한 번뿐인 삶을 상이 아니라 벌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단지 김신뿐일까. 사는 게 그래도 죽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상황, 삶을 위해 죽음을 성찰하는 건 그때에나 가능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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