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9월 2일, 길고도 길었던 2차 세계대전이 공식적으로 막을 내리고 평화가 찾아왔다. 인류는 사상 최악의 대전쟁을 치르며 연합국과 추축국의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도합 7300만에 달하는 생명을 잃었으며, 그 기간 중에 사라진 재산과 인류 문화유산의 가치는 추산할 수도 없을 정도로 끔찍한 참화를 입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종전을 향해감에 따라 미국과 소련은 서로를 상대하게 될 다음 전쟁이 기다리고 있음을 예감했고, 소련은 곧 다가올 소리 없는 전쟁, 통칭 ‘냉전(冷戰)’이 도래하기에 앞서 우선적으로 패전국이 된 독일의 과학자, 공학자, 기술자 등을 잡아들여 활용할 계획을 세우기에 이른다. 이에 미국 또한 이들 ‘인재’들을 소련에 빼앗기기 전에 미국으로 불러들여 정부기관 소속 과학자로 활용할 계획을 세우면서 통칭 ‘페이퍼클립(Paperclip)’ 작전이 입안됐다. 이 계획은 나치 독일의 과학자들이 미국을 위해 일하게 함으로서 독일의 과학 기술을 흡수하고, 더 나아가 향후 진행될 우주 개발 사업도 미국이 선점하려는 의도로 실행되었다.

 

미소 대결에 대비해 인재를 선점하라! 오버캐스트 작전과 페이퍼클립 작전

사실상 ‘초강대국’ 후보였던 미국과 소련이 특별히 나치 독일에 협력한 과학자들을 탐낸 이유가 있었다. 독일은 개전 초부터 거의 홀로 전 유럽 국가를 상대하면서 군수 보급상의 불리함을 안았다. 독일은 이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전쟁 중기에 독‧소 방공협정(몰로토프‧리벤트로프 협정)을 깨고 바르바로사(Barbarossa) 작전을 실시해 소련을 공격했지만 소련을 정복하는 데 실패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물자만 더 빨리 고갈시키는 역효과를 낳았다. 심지어 나치 독일은 1942년부터 ‘무제한의 자원’을 자랑하는 미국이 참전하고 바르바로사 작전의 실패로 소련까지 적으로 돌리게 되자 1943년부터 전선에 투입되어 있던 거의 모든 과학, 공학, 기술자들을 후방으로 불러들인 뒤 전세를 단번에 역전시킬 수 있는 첨단 무기들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들 과학자들과 공학자들을 후방으로 불러들인 독일은 이들에 대한 사상적 신념부터 검증해야 했으므로 독일 군사연구협회의 베르너 오젠베르크(Werner Osenberg, 1900~1974) 회장이 이 절차를 책임졌다. 일명 ‘오젠베르크 리스트’로 불린 이 명단의 일부는 1945년 3월 독일 본(Bonn) 대학교 화장실에서 연합군에게 입수됐고, 영국의 해외 첩보부(Mi6)는 이 명단을 미 정보기관과 공유했다. 미 육군 병기병과의 로버트 스테버(Robert Staver) 소령은 이 명단에 기초해 미국이 체포해야 할 과학자들의 명단을 짜면서 ‘스테버 리스트’라고 명명했다. 이 ‘스테버 리스트’에 근거해 독일 과학자들을 체포할 목적을 가졌던 ‘오버캐스트(Overcast)’ 작전은 페네뮌데(Peenemünde)에서 V-2 로켓 개발을 진행 중이던 과학자들을 대량으로 체포하면서 성격이 바뀌었다. 미군은 이들 과학자와 이들의 가족들을 우선적으로 확보해야 전쟁의 종장(終章)이 될 태평양 전쟁을 조기에 끝낼 것이라고 판단해 남부 독일 바이에른 주 란츠후트에 그들의 거처를 마련해주었다. 미 합동참모본부(JCS)는 1945년 7월부터 이렇게 빼낸 과학자들의 명단을 작성하면서 항공역학 분야나 로켓 과학 분야의 과학자를 중심으로 미 정부가 고용하고 싶은 인물들에 대해서는 인사정보 파일에 종이 클립(Paperclip)을 끼워두는 방법으로 은밀하게 표시를 했고, 이를 계기로 작전명은 ‘오버캐스트’에서 ‘페이퍼클립’ 작전으로 변경됐다.

미국의 우선 관심 대상은 첨단 고급기술을 연구하던 연구인력이었다. 특히 페이퍼클립 작전은 태평양 전쟁을 염두에 두고 독일의 과학력을 흡수한다는 취지였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독일의 과학력이 일본으로 이전될 여지부터 차단하고 독일의 우수한 인력들이 나치 독일에 동조적이던 스페인, 아르헨티나, 이집트로 탈출하는 것을 막는 데 중점을 두었다. 다행히 독일 과학자의 상당수는 ‘바르바로사’ 작전 간 독일의 만행 때문에 소련에 체포될 경우 보복당할 가능성 때문에 미국 진영 쪽에 항복을 희망했다. 1947년까지 미국이 확보한 인력은 1600명의 과학자와 이들의 가족 약 3700명이었으며, 이들은 1945년부터 순차적으로 미국에 도착해 각각 전문분야에 맞춰 미 육군, 미 공군, 미 항공우주국(NASA) 등 다양한 기관에 채용되었다. 이 중 상당수의 과학자는 화이트샌드 등지에서 유도 미사일과 탄도 미사일 등을 연구했다. 이 작전은 1959년까지 진행됐으며, 미 정부는 후속조치로 ‘프로젝트 63(Project 63)’ 등을 실시해 나치 독일 출신 엔지니어들을 미국의 유수 항공업체인 록히드(Lockheed), 마틴-마리에타(Martin-Marietta), 노스 아메리칸(North American) 등에 채용시켰다.

 

첨단 과학의 승계와 그 이면의 어두운 과거

페이퍼클립 작전은 절박한 입장이던 나치 독일의 실험적인 과학 기술을 지휘하던 우수한 인력을 미국으로 불러들여왔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나치 독일에서 V-2 로켓을 개발한 후 미국에서 새턴 5호(Saturn V) 달 탐사 계획을 총 지휘한 베르너 폰 브라운(Werner von Braun, 1912~1977) 박사가 있으며, 120명의 독일 출신 과학자를 이끌고 케이프 커네버럴(Cape Canaveral, 케네디 우주센터로 개명)에서 새턴 5호 개발을 지휘한 열렬한 나치 지지자였던 쿠르트 데부스(Kurt Debus) 박사도 있다. 나사에서 활동한 후베르투스 슈트루크홀트(Hubertus Strughold) 박사는 우주복과 다양한 우주 생명지원 장치들을 개발해 우주개발 사업에 크게 기여했고, 나치 독일의 생명공학자였던 쿠르트 블로메(Blome) 박사는 미군의 화학무기 방호능력 확충을 위해 헌신했다.

하지만 나치 독일에 협력했던 전력이 있는 이들 과학자들의 과거는 계속해서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베르너 폰 브라운 박사만 해도 우주개발 사업에 대한 기여로 포드 행정부에서 민간인에게 수여하는 최고 메달인 대통령 자유메달(Presidential Medal of Freedom)을 수여하려 했지만, 나치 독일에 협력했던 과거 행적이 문제가 되어 결국에는 수여가 무산됐다. 페이퍼클립 작전으로 1946년 미국에 이주했던 게오르크 리카이(Georg Rickhey) 박사의 경우는 SS 무장친위대 및 게쉬타포와 일했을 뿐 아니라 이들의 포로 학살에 관여했다는 혐의 때문에 다하우 재판에 회부되어 독일로 재송환됐다. V-2 로켓 개발에 참여했던 아르투르 루돌프(Arthur Rudolph) 박사는 미 육군과 미 항공우주국(NASA)에서 일하면서 MGM-31A 퍼싱(Pershing) 탄도 미사일 및 새턴 프로그램에 공헌했으나, 79년에 우연한 계기로 그가 2차 대전 기간 중 강제 징용자들을 동원해 로켓 부품 이송에 투입했던 정황이 발견되면서 사법 거래를 통해 미국 국적을 포기하고 서독으로 추방됐다.

 

 

2차대전의 전사들이 냉전의 전사들로

페이퍼클립 작전은 우수한 인재라면 과학자뿐 아니라 군인도 받아들였다. 대표적인 인물은 나치 독일이 대 소련전을 개전했을 무렵부터 나치 독일의 동부해외군(FHO) 군사정보부대장을 지낸 라인하르트 겔렌(Reinhard Gehlen, 1902~1979) 중장으로, 그는 바르바로사 작전 초창기에 소련의 군사적 우세성을 히틀러에게 보고했다가 내쳐졌던 인물이었다. 그는 페이퍼클립 작전을 통해 미 정보기관에 협력하면서 소련에 점령당한 동독 지역 내의 전(前) 나치독일 정보 요원 600여명을 지휘했으며, 1956년 서독으로 이주해 독일연방정보국(FIS) 국장을 지냈다.

래리 손(Larry Thorne) 대위도 페이퍼클립 작전의 또 다른 전설적인 수혜자다. 본명이 로리 토르니(Lauri Torni)인 그는 핀란드 태생으로, 19세가 되던 1939년 핀란드 겨울전쟁에 참전해 소련과 싸우다 1944년 핀란드가 소련에 항복하자 독일로 도망쳐 SS 기갑친위대에 들어갔으며, 다시 독일이 패전하자 이번에는 영국군에게 체포됐다. 그는 수용소를 탈출해 고향에 숨었으나 핀란드 당국에 이적 혐의로 체포당해 6년형을 선고받았다가 사면령을 통해 만 3년 만인 1948년에 풀려났다. 그는 페이퍼클립 작전이 시작되자 미국에 특수전 병과를 설치하던 윌리엄 도노반(William J. Donovan, 1883~1959) 장군에게 포착되었으며, 도노반 장군은 토르니를 체포해 소련 법정에 전범으로 세우려는 소련과 경쟁을 벌여 간신히 그를 화물선에 숨겨오는 방법으로 미국에 데려왔다. 이후 토르니는 ‘래리 손’이라는 이름으로 미군에서 교관으로 활동하다 특수전 전문가로 활약하면서 이란의 비밀 침투작전이나 베트남 전쟁을 통해 은성 훈장 1개와 전상장 5개를 수상했다. 안타깝게도 그는 1965년 10월, 라오스 접경 인근에서 호치민 트레일로 침투하는 베트콩의 기습을 차단하기 위해 투입됐다가 악천후로 인한 헬기 추락사고로 순직했으며, 유해는 1999년에 발견되어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치되었다.

 

희대의 반인륜 범죄에 대한 면죄부인가, 국익을 위한 올바른 선택인가

페이퍼클립 작전은 인류 최악의 반인륜적 범죄를 일으킨 나치 독일에 협력했던 과학자들을 사면했다는 점 때문에 아직까지도 논란이 많다. 이 작전을 옹호하는 측은 만약 이들 ‘나치 출신 과학자’들을 미국으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대다수가 소련에게 체포되었을 것이고, 독일의 첨단 과학은 소련의 손에 들어가 냉전 간 ‘힘의 균형’은 공산진영으로 쏠렸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반대 측은 어찌되었든 나치에 협력한 ‘전범’ 행위에 대한 모든 처벌과 책임을 면제시킨 도덕적 가치의 훼손이 국익 때문에 상쇄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어쨌든 이들은 미국으로부터 부여받은 두 번째 기회를 통해 과학 기술의 발전뿐 아니라 우주개발 분야에서도 크나큰 족적을 남겼으며, 이는 전 인류에게 그들만이 할 수 있던 속죄 방법이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