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명절에 한복 입은 사람 처음 보네.”

부모님을 뵈러 가기 위해 시외버스를 오르던 필자에게 버스기사는 매우 반가워하며 이렇게 말했다. 살짝 눈인사를 하고 버스 깊숙한 안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고개를 길게 빼 버스 안을 둘러보았지만 한복을 입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그러고 보니 무궁화와 새마을호, KTX열차가 지나는 역을 거쳐 왔지만,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한복은 발견하지 못했다. 언제부터인가 한복을 입은 ‘동료’를 애타게 찾고 있는 필자 자신을 발견한다. 안타깝게도 그러한 시도는 대부분 실패하고 만다.

“한복을 입고 뭘 할 수 있을까요?” 같은 질문에 다도, 집안 잔치, 한국무용공연 등과 같은 ‘뻔한’ 답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요즘 한복 동아리에서 활동하는 대학생들에게 같은 질문을 하면 ‘그냥 다 할 수 있어요’와 같은 답이 돌아온다. 십여 년 전 국어와 한문 선생님들이 즐겨 입던 개량 한복 붐 이후로 몇 년 새 나타난 한복 입고 놀기 현상은 아주 주목할 만한 변화였다. 한복을 입고 나들이를 가는 것을 뛰어넘어 춤을 추고, 여행을 가고, 심지어 히말라야 트레킹까지 한 한복 활동가들을 본 사람들은 한복을 입고 할 수 있는 다양한 활동의 가능성에 깊이 고무됐다.

‘한복을 입고 어디까지 가서, 무엇까지 할 수 있을까?’와 같은 질문은 필자가 한복 활동을 시작했던 2013년도부터 품어왔던 필자의 궁금함이었다. 한복을 입고 버스, 지하철, 비행기 등의 대중교통을 탔고, 전통혼례 아르바이트나 파티, 캠페인, 패션쇼와 같은 행사에도 참여했다. ATV를 타고 패러글라이딩을 했다. 고무신에 아이젠을 끼우고 두 손에는 스틱을 잡은 채 설산 트래킹도 했다. 한복을 입고 할 수 있는 뻔한 그림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한복 입고’라는 경계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한복은 필자에게 매우 익숙한 옷이 되었기 때문에 입고 있는 옷이 한복이건 그렇지 않건 큰 의미를 둘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필자는 결론을 내렸다. ‘한복을 입고 어디든 가서, 그 무엇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들은 ‘애국심’으로 잘 포장돼 기사를 탔다. 이러한 기사를 본 다른 사람들도 한복을 입는 것에 자꾸 뭔가의 이유를 덧붙이기 시작했다. 한국을 알리기 위해 입었다,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외국인들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등등. 전통의 옷이라는 무게감에서 홀가분해지기 위해 시도됐던 많은 액션들은 결국 다시 전통 속에 다시 매이고 만다.

그동안 국가기관과 대중매체에서는 한복의 유행과 붐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했고 새로운 풍속이라 소개해 왔다. 그러나 명절에 한복 입은 사람을 발견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2개 도를 걸쳐 며칠을 머물렀지만 한복 입은 동료를 만나지 못했다. 그 즈음하여 필자의 한복 활동 인터뷰가 포털에 올랐는데, 기사에는 이런 댓글이 달렸다. ‘한복 입고 전 부치고 쭈구려 있어 봐라. 입어지나.’ 이것을 읽고 나서 필자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막상 한복이 잘 어울리는 시기가 되면 아무리 예쁘게 한복을 입고 싶어도 일할 준비 태세를 갖춰야 한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이 혼인을 계기로 맞추는 한복은 꽤 고가다. 혼인 후 어른들을 찾아가 인사를 드릴 때면 몰라도 이듬해부터는 본격적인 제사 준비에 투입되어야 하니 예쁜 옷보다는 목 늘어난 티셔츠를 선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한복이 더 많이 보일 것으로 예상되는 명절에는 오히려 한복 입은 사람들이 더 보이지 않는 기현상이 나타나게 됐다.

한복을 입는 행위는 일종의 부담에서 시작한다. 많은 사람들이 입지 않는 옷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또 어떤 이에게는 대리만족의 대상이다. 궁궐을 지날 때는 세상의 아주 많은 사람들이 한복을 입는 것 같지만, 횡단보도 하나만 건너도 전혀 다른 세계와 마주하게 된다. 어차피 한복 입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관심과 시선을 받아야 한다면 좀 더 당당해질 필요도 있다. 무슨 특별한 일이 있어 입었다기보다는 ‘나의 스타일’이 한복인 것처럼 말이다. 구구절절 한복 입은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아도 좋다. 여밈과, 고름과, 풍성한 종 모양 치마가 좋은데 이 스타일이 모두 들어가 있는 옷이 한복인 것일 뿐이다.

다가올 추석에는 명절을 지내는 어머니들도, 많은 여성들도 한복을 입고 ‘예쁘게 있을 수 있기를’ 바라본다. 그렇게 된다면 명절은 더 이상 괴로운 시간이 아니라 다 함께 즐길 수 있는 축제이지 않을까. 누군가 억지로 입으라고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한복을 선택하는 순간은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즐거움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