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회문 회장 별세, 증권업계의 큰 별이 지다

“아직도 안타깝다. 물론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 ‘예상’이 그렇게 빨리 다가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아니면 믿고 싶지 않았던 것일 수 있다. 양회문 회장은 대신증권 직원들이 많이 존경했던 만큼 정신적으로도 크게 의지했던 것 같다. 비보를 접한 날이 기억난다. 장이 끝나고 고객들을 만나 얘기하던 중이었다. 일 때문에 고객을 만나고 있었지만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사실 양 회장을 직접 대면한 적도 없어서 정들 일도 없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양 회장은 물론 대신증권을 많이 사랑하고 의지했던 것 같다.”

대신증권에서 근무했던 한 직원의 말이다. 양 회장이 지병을 앓고 있다는 얘기는 들었다. 하지만 2001년 명예회장 자리에 올라 일선 경영에서 물러났어도 2003년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사와 서울 상공회의소 의원으로 활동하는 등 활발한 모습을 보여 양 회장의 건강에 대해 크게 우려하진 않았던 것이다.

▲ 출처:대신증권

그러던 중 2004년 9월 17일 대신증권에 비보가 닥쳤다. 양 회장이 지병인 폐암으로 별세(향년 53세)했다는 소식이었다. 양 회장은 1975년 그의 부친인 양재봉 명예회장이 창업한 대신증권에 공채 1기로 입사했다. 이후 약 30년간 ‘대신맨’으로의 활동은 막을 내리게 됐다.

이 직원은 “당시 대신증권 직원들은 ‘단독 증권사’라는 타이틀에 대한 자부심이 엄청 강했다”며 “대기업이 소유한 증권사들을 부러워할 법도 했지만 우리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그는 이어 “당시 성과급으로 대신증권 주식을 받는 제도가 있었는데 돈도 중요하지만 ‘내 회사’라는 애착은 자부심과 더해 직원들의 사기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다”며 “이러한 상황에서 양 회장의 별세 소식은 상당히 충격이었다”고 전했다.

당시 대신증권 직원들의 회사에 대한 충성심은 물론 양 회장을 향한 존경의 마음은 상당했다고 전해진다. 대신증권은 아시아 외환위기 이후 대신생명 등 계열사 부실화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양 회장은 긍정적 마인드로 위기를 극복해냈고 ‘단독 증권사’라는 타이틀로 대신증권을 더욱 강하게 키웠다.

양 회장은 회사의 경영성과를 회사, 주주, 종업원이 공유하는 제도인 ‘3분법’을 2002년에 도입, 대신증권 임직원들은 회사의 성과를 신우리사주조합(ESOP)을 통해 주식으로 받았다.

당시 다른 증권사에 근무했던 한 직원은 “대신증권은 은행, 보험 등 계열사가 없는 단독 증권사였다”며 “독보적인 리서치 능력과 ‘큰 대(大), 믿을 신(信)’을 강조하는 등 금융업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신뢰의 대신’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당시 증권업계 종사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대신증권 입사를 꿈꿨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초 HTS 도입과 ‘단독 증권사’의 역풍

많은 사람들이 HTS하면 온라인 거래, 그리고 이어 온라인 거래하면 키움증권을 떠올린다. 그러나 대신증권은 증권 IT에 큰 획을 그은 증권사다. 1990년대 후반 대신증권은 국내 최초로 HTS시스템을 도입했고 당시 국내 주식시장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에 여타 증권사들도 HTS 프로젝트에 착수하기 시작했고, 대신증권의 HTS는 이들의 ‘참고서’가 됐다.

당시 한 증권사의 HTS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개발자는 “대신증권 HTS 안에 있는 프로그램들을 가리키며 구현할 수 있는지 여부의 질문을 가장 많이 받았다”며 “그만큼 대신증권의 HTS는 업계 표준이나 다름없었다”고 전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국내 증권사들의 HTS는 빠르게 발전하기 시작해 점차 상향 평준화됐다. 어느 덧 HTS의 강자로 불리던 대신증권은 그 힘을 잃기 시작했고, 양 회장의 별세와 맞물려 대신증권의 외형은 점차 축소되기 시작했다.

한편, 1990년대 후반 아시아 외환위기의 충격이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2000년대 초 IT 버블과 9·11테러 등이 발생하며 시장을 위축시켰다. 이는 국내 증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증권사들의 실적도 하락하기 시작했다.

▲ 출처:이코노믹리뷰 DB

또 온라인 증권사 등장과 홈트레이딩시스템(HTS) 등의 보편적인 도입은 증권사의 주 수익원인 거래수수료 하락에 압박을 가했다. 여기서 대신증권의 ‘단독 증권사’라는 타이틀은 당시 국내 증권업 환경 변화에 가장 취약한 증권사였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대신증권의 외형과 수익성은 코스피 지수가 역사적 고점인 1000포인트를 넘어서 활황을 보인 2005년부터 개선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는 대신증권만이 아닌 국내 대부분의 증권사들의 실적이 가파르게 개선되는 시기였다.

한 증권사 직원은 “양 회장 별세 이후 어려운 상황에서도 대신증권이 잘해나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며 “하지만 금융위기 이후 ‘단독 증권사’라는 타이틀에 오히려 역풍을 맞았던 것으로 생각된다”고 전했다.

대신그룹은 대신증권 외 계열사의 부재로 여타 증권사 대비 거래수수료 의존도가 유독 높아 외부 환경에 더욱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에 많은 증권업 관계자들은 대신증권의 향후 존속 가능성에 대해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점차 낮아지는 수수료는 물론 오로지 여기에 의존해야 하는 대신증권. 변하지 않는다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 있는 분위기였다. 대신증권 관계자는 “거래 수수료를 통해 증권사가 성장할 수 없다는 생각이 팽배해지기 시작했다”며 “기업의 성장도 문제지만 거래 수수료가 궁극적으로 고객들의 자산에 해가 되는 것을 알기에 이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대신증권은 변화의 닻을 올렸다. 대신증권이 역사 속으로 사라질지 혹은 새로운 모습을 선보일지 기로에 선 시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