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ly, 40.9×60.3㎝

 

“골짜기와 언덕 위에 높이 떠도는 구름장처럼 나는 외로이 배회하고 있었네. 그때 문득 보았지. 한 무리의 황금빛 수선화가 호숫가 나무 아래서 미풍에 하늘거리며 춤추고 있는 것을. 은하수에서 반짝이며 빛나는 별들처럼 그들은 호수의 가장자리를 따라 끝없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네. 나는 한눈에 보았지. 무수한 수선화들이 머리를 흔들면서 흥겹게 춤추고 있는 것을.”<헨리 워즈워스 롱펠로(Henry Wadsworth Longfellow) ‘수선화’ 詩, 세계의 명시산책, 한일동 편저, 도서출판 동인>

 

새벽은 시간을 재조정하는 마력을 부릴 때가 있다. 그런 때 강가의 안개는 익숙함을 뛰어넘은 전혀 다른 차원의 수평적 공간을 연출해낸다. 그로 말미암아 그 속에 등장하는 것들을 마음 의 기호로 새길 때, 비로써 정경은 말을 걸어오기 시작한다. 강가엔 공기흐름이 잠시 멈추는 정지된 순간의 고요가 흘렀다. 새 한마리가 안개 속을 뚫고 비행하는 적막을 흩트리는 날개 짓이 안개와 부딪치며 둔탁한 소리를 퍼뜨렸다.

피아니스트 스비야토슬라프 리히테르(Sviatoslav Richter)가 연주한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피아노협주곡 1번’ 건반이 숨죽인 듯 고요한 살얼음 낀 겨울새벽 강, 적막을 깨뜨리며 회오리처럼 몰아친다. 엷게 찰랑이는 물 위에 수직으로 내려 박히듯 일시에 번지는 파문(波紋)….

 

▲ Fog, 97.0×145.5㎝ oil on canvas, 2016

 

멈춤과 움직임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두꺼운 벽 안개를 밀어가듯 자유자재로 옥타브(octave)를 넘나드는 건반은 차라리 강렬했다. 묵묵히 제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고독한 남자의 남루한 뒷모습에서 풍겨오는 야릇한 비감처럼 긴박한 템포에 이끌려 서서히 강가엔 고행처럼 물안개가 번져갔다. 여명의 창공에 두 날개를 활짝 펴며 유유히 원을 그리다 새는 날개에 힘을 실어 소리의 진원지를 향했다.

놀랍게도 자그마한 메모지 하나를 입에 물고 떨어트리는 것이 아닌가. ‘침묵하는 것에서 답을 구하려면 아마도 그것의 본질은 허무일 것 이예요.’ 긴장이 풀어지며 가늘게 안도의 숨을 길게 내뿜을 때 먼동이 텄다. 아직은 여린 햇살이 강물 위를 보드라운 손길로 만지작거리며 선율에 섞여 안개 속으로 수줍게 흩어지곤 했다.

 

▲ Fly, 97.0×145.5㎝

 

새벽, 안개, 강, 풀, 꽃…. 청춘의 시절 전투 같았던 거칠기만 했던 열망들이 꽃잎으로 단장한 이른 봄날의 강물처럼 비루투오소(Virtuoso)의 피아노포르테 선율이 흘렀다. 그러고 보니 조금씩 찰랑찰랑 소리만 내던 강물이 보이는 듯했다. 희미해지는 이별의 기억의 끈을 이어주려는 듯 여린 건반은 사랑의 위안처럼 아늑한 선율로 젖어들었다.

 

지혜로운 새는 세상에 와서

제 몸보다 무거운 집을 짓지 않는다.

바람보다 먼 울음을 울지 않는다.

지상의 무게를 향해 내려앉는

저녁 새 떼들 따라 숲이 저물 때

아주 저물지 못하는 마음 한 자리 병이 깊어서

집도 없이 몸도 없이

잠깐 스친 발자국 위에 바람 지난다

가거라,”

<류근 詩 새, 문학과 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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