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만난다. 아베 총리는 미국의 압박 공세에 못 이기는 듯, 한 발 물러나는 분위기다. 그러나 아베는 정치인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며 그의 미국행이 ‘정치’로 ‘경제’를 잡으려는 행동이라는 의견이 제시됐다.

오는 10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미국 워싱턴DC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다. 일본 언론에 따르면 아베 총리는 미국의 일자리 창출을 지원하는 포괄적 정책 패키지를 제시할 계획이다.

아베의 이런 행동은 트럼프 정권의 노골적인 대일 통상압력에 대응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일본은 한국, 중국과 함께 환율조작국 전 단계인 ‘관찰대상’에 오른 상태다.

일본은 아베 취임 이후 아베노믹스의 일환으로 엔저를 유도해 일본 기업들의 수출증가 및 자국 생산 확대로 경기 회복을 견인했다. 하지만 이는 트럼프 정부가 선호하는 달러 약세에 반하는 정책이다.

트럼프는 일본의 자동차 시장이 불공정하고, 일본 정부가 외환시장 개입을 통한 엔화 약세를 유지하는데 부정적 뉘앙스를 내비친 바 있다. 한편, 아베는 그동안 국회에 출석해 “외환시장에 개입하지 않았다”면서도 “향후 환시 개입을 배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비상상황에서는 외환시장의 직접 개입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다.

한편,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중앙은행(BOJ) 총재는 지난 31일 금융정책결정회의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보호무역주의 가능성은 낮을 것”이라며 “향후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정책을 주의 깊게 살피겠다”고 말했다. 아울러 “물가 목표 달성을 위해서라면 금융완화정책기조를 지속하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해할 수 없었던 BOJ 정책...미 금리인상 노렸나

미·일 10년물 금리차(미·일 금리차)와 엔/달러 환율의 괴리는 2014년 하반기부터 본격 확대되기 시작했다. 당시 국제유가가 배럴당 100달러에서 50달러로 폭락하면서 달러는 강세 기조를 이어갔으며 이는 아베노믹스와 맞물려 엔화를 약세로 몰았다.

▲ 출처:한국거래소

하지만 2016년 초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등 글로벌 불확실성이 확대되면서 미 연방준비제도(연준, Fed)의 금리인상 가능성이 낮아지기 시작했다. 아울러 안전자산으로 여겨지는 엔화는 그 수요가 증가하면서 엔/달러 환율의 상승은 저지됐다.

2014년 하반기부터 2016년 초까지 벌어진 미국과 일본의 10년물 금리차(미·일 금리차)와 엔/달러 환율의 괴리는 점차 좁혀지기 시작했다.

괴리 축소 후 엔/달러 환율은 지난해 11월 트럼프 대통령 당선이 확실시된 후 가파르게 상승(엔화 약세)하기 시작했다. 이는 트럼프의 공약으로 향후 미국의 인플레이션 발생 가능성 및 재정지출 증가에 따른 미국 재정상태 악화라는 상반되는 전망이 동시에 미국채 금리를 끌어올리는 요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최근 금리상승이 주춤해지자 미·일 금리차와 엔/달러 환율은 상승세를 멈추고 숨고르기에 들어간 상태다.

여기서 되돌아봐야 하는 것은 BOJ가 지난해 9월 통화정책회의에서 일본 10년물 국채금리를 0%로 타게팅한 정책을 도입했다는 것이다. 금리 타게팅을 평시에 쓴 것은 BOJ가 처음이다. 당시 일본 10년물 국채금리는 2016년 초 마이너스 금리를 도입한 이후 지속적으로 하락해 같은 해 7월 기준금리(-0.1%)를 하회하는 -0.3% 수준까지 내려간 바 있다.

이에 전문가들은 BOJ의 정책을 두고 커브 스티프닝(Steepening, 금리 격차 확대)을 유도하기 위함이라고 입을 모았다. 또 본격적인 테이퍼링(양적완화축소)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냐는 시장의 의구심도 확대됐다.

BOJ의 커브 스티프닝에 대한 가장 원론적인 얘기는 일본 시중은행들의 수익성 악화를 해소하려는 목적이라는 점이다. 일본 은행들은 미국과 달리 예대마진 의존도가 높고 민간영역의 현찰 선호가 강해 시중 은행이 마이너스 예치금 금리로부터 발생하는 비용을 예금자에게 전가하기 어렵다.

또, 일본의 보험과 연기금 자산은 미국과 달리 주로 채권으로 운용된다. 그만큼 시장금리가 떨어져 운용수익률(보험사는 예정이율)이 하락하면 연금 납부금이나 보험료가 올라가게 된다. 이는 다시 소비를 제약하고 저축률을 높이는 ‘저금리의 역설’로 작용하게 된다. 그만큼 BOJ 입장에서 커브 스티프닝 유도는 금융사의 수익성과 소비 측면에서 외면할 수 없었던 셈이다.

그러나 BOJ 정책 중에서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연간 80조엔의 양적완화(QE)목표를 유지함과 동시에 10년물 국채 금리 목표를 0%로 타게팅했다는 것이다.

물가가 상승할 경우 금리는 상승압력을 받게 돼 BOJ 정책은 유효하지만 반대로 물가가 하락하면 BOJ는 타겟이 0%이므로 채권 매입을 중단하거나 오히려 매도한다. 디플레이션 상황이 발생하는 데 통화의 공급을 줄이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BOJ는 인플레이션 발생을 확신하고 이러한 정책을 펼친 것일까. 당시는 물론 현재도 일본의 경기회복과 물가상승에 대한 기대감은 낮은 상황이다. 그렇다면 BOJ의 진짜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트럼프의 당선 가능성은 차치하더라도 BOJ의 입장에서 미국의 금리인상은 상당히 중요한 이슈였다. 미 연방준비제도(연준, Fed)가 점진적인 금리인상에 나선다면 일본은행의 입장에서는 파격적인 자산매입 정책이 필요 없다. 그것이 미국의 경제성장에 따른 ‘자연스런 경로’라면 더욱 그렇다. 이에 일본의 미국 내 고용창출 정책에 더욱 눈길이 쏠린다.

‘정치인’ 아베...엔화 약세는 진행형

‘돈을 하늘에서 뿌린다’는 의미에서 유래된 ‘헬리콥터 머니’를 양적완화(QE)의 시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헬리콥터 머니는 정부가 재정지출 확대를 위해 발행한 국채를 중앙은행이 시장을 통하지 않고 직접 사주는 것이다. 따라서 헬리콥터 머니는 통화정책이 아닌 재정정책의 성격이 강하다.

브렉시트 이후 일본의 헬리콥터 머니 가능성이 제기되자 강세를 보이던 엔화는 약세로 곧장 돌아섰다. 하지만 당시 구로다는 그 가능성을 전면 부인했다.

구로다가 이러한 반응을 보인 이유로는 과거 일본의 헬리콥터 머니 정책의 실패를 꼽을 수 있다. 일본은 지난 1930년을 전후로 ‘쇼와 공황’이라는 극심한 불황을 겪었다. 당시 일본의 총리이자 대장상인 다카하시 고레키요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헬리콥터 머니를 단행한다.

그 결과 단기적으로는 상당한 효과를 거뒀으나 이후 인플레이션이 심화되고 다카하시는 이를 억제하기 위해 군사비 축소를 중심으로 재정지출을 제어했다. 결국 다카하시는 반감을 품은 군인들로부터 1936년 무참히 살해된다.

이후 멈추지 않는 인플레이션은 일본을 제2차 세계대전으로 끌어들이는 계기가 됐고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헬리콥터 머니, 즉 머니타이제이션(부채를 중앙은행이 떠안는 것)은 금기시 돼 왔다.

한편, 작년 7월 14일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아베 총리의 경제자문을 맡고 있는 하마다 고이치 예일대 명예교수의 인터뷰 내용을 보도했다.

하마다 교수는 “헬리콥터 머니는 정치인들에게 너무 유혹적”이라며 “정치인들은 돈을 찍어서 쓸 수 있는 것이 가능해지면 자신들의 목적이나 야망을 위해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아베는 ‘경제인’이 아닌 ‘정치인’으로 헬리콥터 머니가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구로다의 입장에서 헬리콥터 머니는 ‘다카하시의 망령’과 같다. 일본의 재정·통화정책이 엇박자를 이루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일본 통화정책이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한 운용사 펀드매니저는 당시 상황에 대해 “BOJ 정책에 관심을 두는 주체가 사라지기 시작했다”며 “BOJ가 무엇을 하든 상관없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는 재정정책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었다”며 “그 연장선에서 볼 때, 아베의 미국행은 ‘정치’로 ‘경제’를 흡수하려는 행위”라고 설명했다.

시장에서는 구로다보다 아베의 영향력이 향후 일본의 정책 가운데 큰 비중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는 시선이 팽배했다는 것이다. 그런 아베가 트럼프와 만난다. 아베는 분명 정치인이다. 트럼프는 정치인이지만 근본적으로는 경제인이다.

일본의 미국 내 투자로 미국 경제가 활성화되고 트럼프는 이를 반긴다. 이에 시장금리 상승이 달러를 강세로 이끈다면 엔화약세를 추구하는 아베의 목적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아베의 ‘미국행’은 ‘정치’로 ‘경제’를 주도하려는 행동이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