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인가, 2008년인가. 영상취재를 하던 시절입니다. 오전 11시 백화점에서 실생활에선 절대 쓸모가 없을 것 같은 수백개의 다이아몬드로 치장된 속옷을 이fl지리 촬영한 후 점심먹으러나왔을때. 서울시의회 앞으로 가라는 데스크 지시가 있었습니다. 후다닥 가보니 철거민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었어요. 한 100여명 정도로 기억합니다. 그들은 피켓과 구호를 내세워 서울시의회에 들어가려고 했고, 전경들은 그들을 필사적으로 막고 있었습니다.

어린 연차에, 희한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한 철거민이 인파에 밀려 비명을 지르면서 낮은계단 아래로 구를 무렵이었습니다. 나름 서울 한 복판에서 100여명이 전경과 충돌하고 있는데 취재하는 사람이 나밖에 없어? 그러다가 서울시의회 진입에 실패한 철거민들이 제2청사로 몰려갔고 어리버리 따라갔던 절 붙잡은 철거민들은 이런저런 하소연들을 했습니다. 눈물이 핑 도는 절절한 비명들. "약자를 보호하라"

 

 

약자는 정의다? 시간이 흘러 저도 9년차가 되었습니다. 아직도 꼬마 수준이지만 몇 가지 달라진 것이 있어요. 그 중의 하나가 "약자를 보호하라"는 절대적 명제에 대한 불신. 약자를 보호하라는 말은 맞습니다. 하지만, 약자가 곧 정의는 아니더라고요. 철거민들이 훗날 보여준 행보를 보며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던 나름의 기억입니다. 세개의 에피소드를 소개합니다.

최근 흥미로운 이슈가 있었습니다. A라는 스타트업이 있어요. B라는 대기업이 인수합병 제안을 했다네요? A는 '땡큐!'했답니다. 그런데 나중에 인수합병이 틀어지고 말았어요.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A가 그리 매력적인 기업이 아니라서. 그러자 A는 발끈합니다. "대기업의 갑질이다!" 이 사실을 안 것은 모 토론회에 참석했을 때였습니다. 토론회 막바지에 A 스타트업 대표가 갑자기 마이크를 잡고 '갑질'을 폭로했거든요. 그런데 B쪽 사람들도 나와 있었지요. B쪽 사람들은 "아니다!"고 외쳤어요.

추가취재를 해봤습니다. A기업에 대해 B가 인수합병을 제안한 것은 사실이더군요. 나중에 일이 틀어진 것도 사실이고요. 그 과정에서 B쪽 담당자가 A에게 '당장이라도 인수합병이 될 것처럼 굴었던 정황'도 포착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A의 상황이었어요. 막대한 빚이 있더군요. 그리고 문제가 커지기 전, A가 B에게 '인수합병이 틀어져서 추가투자 등의 피해를 입었으니 00억을 지급하라'고 제안한 것도 확인했습니다. 그 추가피해 현황은 지극히 자의적이고, 근거는 없었습니다.

B는 하소연합니다. '담당자의 실수'가 있었던 것은 인정하지만 A도 B의 담당자가 권한이 없고, 일을 잘 성사시키기 위해 공수표를 던진 것을 알고 있다고. 그걸 빌미로 협박을 하고 있다고. 참고로 B의 담당자는 이번 일에 대한 스트레스로 정신치료를 받고 있답니다.

그림이 그려집니다. B가 A에게 인수합병을 제안했는데, 일단 B는 '아니다'싶어 나중에 이를 파기했어요. 이 과정에서 B의 담당자는 마치 당장이라도 인수합병이 될 것처럼 굴었던 패착'을 저질렀고, A는 이를 자료로 만들어 저에게 넘겼습니다. 하지만 B는 정상적인 인수합병 파기였고, 담당자의 실수는 인정한다고 합니다. A는 빚이 있고, 믿을 수 없는 근거로 피해규모를 산정했으며, B의 담당자 권한이 낮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요.

이걸 어떻게 봐야 할까요? 분쟁은 아직도 진행되고 있어 뭐라고 말은 못하지만, 전 조심스럽게 A를 의심하는 중입니다. 다만 B도 미심찍어요. "담당자가 징계를 받나요?"라고 물으니 "아니요"라고 했거든요. 책임을 담당자에게 돌리고 무마하려는 상황에서 제가 집중적으로 들여다보기 시작하자 '진심의 조각'을 일부 드러낸 느낌이 들었습니다.

▲ 출처=픽사베이

지식재산권 분쟁 또 하나의 취재사례. 스타트업 얼라이언스를 표방하며 이제는 대기업 수준이 된 C라는 기업, 그리고 스타트업인 D라는 기업이 지식재산권을 두고 붙었습니다. C와 D는 업무협약을 위해 만나기도 했는데 별안간 C가 협약을 종료시키고 D와 비슷한 서비스를 출시했습니다.

D는 C를 고소했고, 이건 C의 판정승. 검찰에서 불기소 결정이 났거든요. 하지만 특허심판원은 D의 손을 들었습니다. D는 이 사실이 알려지자 기습적으로 공격했고 C는 당황한 기색이 그대로 묻어나는 입장자료와 반응을 보였습니다. 여론전의 중심은 이렇게 돌아가고 있어요. C는 특허심판원, D는 검찰. 각자 유리한 것을 부각시키며 싸우는 중입니다.

이 취재를 하며 재미있는 사실 하나. C는 이렇게 항변합니다. "D 기술은 E라는 기업이 가진 오픈소스다. 우리는 그걸 사용한 것"이라는 주장. C가 말하는 E기업의 기술을 직접 취재했습니다. 그런데 충격. "D의 기술은 F와 다른 기술입니다. 오픈소스요? 아닙니다” 더 충격적인 증언. "그런데 C 기술은 D 기술과 판박이던데" 이 사실을 C에 알리고 반응을 살폈습니다. C가 하는 말. "그건 우리가 예시를 위해 말한 것이고, 지금은 입장을 정리중이다"...제가 "그럼 E의 오픈소스라는 주장은 철회하는 것이냐"고 물으니 그건 또 "아니다"는 답.

미묘한 지점은 있습니다. 분쟁은 현재진행형이지만 따지고 보면 C를 대기업이라고 보기는 약간 어렵다는 점. 그리고 각자 펼치는 주장이 너무 다른 중심축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말을 바꾸는 사람은 약간 신뢰하기 어렵다는 점.

▲ 출처=픽사베이

"꿇어라, 이것이 너와 나의 눈높이다" F라는 정부소속 협회와 G라는 스타트업이 있습니다. 어느날 F가 G가 속한 업계의 갑질을 지적하는 보도자료를 내었어요. 업계는 발칵.

취재를 해봤습니다. 일단 F는 "통상적인 업무였다. 감시기능 중 하나"는 답이 왔습니다. 그런데 보도자료의 근거가 희박하다는 것이 문제. 설문조사를 중심으로 G의 갑질을 지적했는데 근거가 빈약합니다. 이걸 질문하자 F가 말합니다. "이건 최종목표를 향한 과정에서 나온 일시적 조사일 뿐"

뭔가 다급하게 선을 긋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 모 취재원의 도움을 받아 F의 노림수를 조금 깊숙히 들여다 봤습니다. 아, 법안을 준비하고 있더군요. G가 속한 기업은 물론, 전자상거래 일반을 조이는 법안. 이를 간파한 G는 전자상거래 업체들과 연합하려는 행보를 시작했습니다. 일단 고소부터 시작하더라고요.

그렇게 일이 진행되다가 최근, F가 힘있는 정부단체의 인사를 영입한 후 G와 얽힌 분쟁을 더욱 강하게 끌고가려는 움직임을 포착했습니다. 사태를 수습하는 공동자료를 만들거나, 지옥을 경험하거나. 제가 아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 출처=픽사베이

누구나 악자도, 선인도 된다

누구나 악자도, 선인이 되기도 합니다. 특히 정신없이 얽힌 스타트업 업계에서 복잡한 욕망의 권력은 상대를 가리지 않고 스스로를 갉아먹습니다. 이 혼돈의 나선을 어디에서부터 풀어야 할까. 생각이 깊어지는 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