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의 간도 협약은 그 영토의 주인인 우리나라가 외교권이 없는 상태에서 일본과 청나라가 마음대로 맺은 협약이다. 물론 그 자체가 불법이다. 하지만 당시 일본의 속셈을 알고 나면 더 경악할 일이다.

일본은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맺던 그 당시에 머지않아 청나라가 망하고 한족 중심의 나라가 건국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나라의 이름을 중화민국이라고 할 것까지는 몰랐더라도 한족중심의 나라를 건국하고자 한다는 것은 웬만한 정보력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던 상황이기 때문이다.

원래 중국은 명나라 이전부터 한족 중심의 나라로 존재하면서 동이(東夷)·서융(西戎)·남만(南蠻)·북적(北狄)이라 하여 동서남북에 오랑캐들이 들끓는다고 했었다. 특히 동이에 관하여 살펴보자면 이는 동쪽의 오랑캐라는 뜻이다. 그런데 한족이 그들 스스로 중원이라 부르면서 중화문명을 꽃 피웠다고 자랑하던 황하 중하류 유역, 즉 화북평원의 동쪽은 바다이니 여기서 말하는 동이라는 것은 동북쪽의 이민족을 의미한다. 즉 한족 중심의 고대 중국이 우리의 고조선과 국경으로 마주했던 난하의 동북쪽으로 보는 것이 옳다. 물론 동북쪽이라고 해서 단순히 우리 민족만 살았던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당시의 사정으로 본다면 우리 선조들이 그 주를 이루고 있던 곳이다. 결국 동이족은 한족이 우리민족을 지칭하던 말이다. 여기서 한 가지 더 하자면 동이(東夷)의 정확한 의미를 알고 갈 필요가 있다.

동이(東夷)는 글자 그대로만 보자면 동쪽에 사는 오랑캐라는 뜻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글자가 바로 오랑캐 이(夷)자이다. 이 글자는 큰대(大)와 활궁(弓)자를 합쳐놓은 글자다. 그렇다고 커다란 활을 가지고 다닌다는 것으로 받아들일 일이 아니라 활을 잘 쏘는 민족이라는 뜻으로 이것은 중국의 문헌에서도 다루고 있다. 훗날 동이족이라 불리던 고조선의 후예인 고구려의 시조인 고주몽의 주몽(朱蒙)이라는 이름이 부여에서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을 본다면 충분히 뒷받침 되는 이야기다. 결국 한족 중심의 중국에서는 우리민족의 선조들을 동이족이라 부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당시의 중국 상황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 당시 중국은 청나라로부터 독립하여 한족의 중국을 세우는 것이 지상 최대의 과제였다. 이민족으로부터의 독립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청나라는 한족이 아니니 중국의 역사가 아니라 중국을 지배한 지배자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한족 중심의 나라를 이루고 있던 시절에는 자신들의 문화를 중화문명이라고 지칭하며 한족만이 지상 최고의 문명을 소유하고 있는 민족이고, 한족이 지배하고 있는 땅이 모든 문명의 근원이라는 자부심에 자신들의 본거지를 중원(中原)이라 불렀던 자존심을 짓뭉개 버리고 자신들을 지배한 청나라로부터 독립하는 것만이 한족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길이었다. 물론 그 전에 원나라로부터 지배를 당하기는 했었지만 그것은 청나라에 비하면 짧은 기간 동안이었기에 더더욱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이 절실했다. 이런 절박한 독립에 대한 의지가 결국 신해혁명을 불러일으켜 중국독립을 가져온 것이다.

간도협약을 맺던 시기는 신해혁명 성공으로 인한 중화민국 건국 3년 전의 일이니 당시 아시아를 점령하기 위해서 군사 정보력을 총 동원했던 일본으로서는 당연히 청나로부터 독립된 한족 중심의 중국이 건설될 것임을 알았을 것이다. 신해혁명의 기치는 멸만흥한(滅滿興漢)이었으니 이것은 만주족의 나라인 청나라를 멸망시키고 한족의 나라인 중화민국을 건설하자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 기치는 단순히 신해혁명의 기치가 아니었다. 청대 말기 일어난 반 청 운동의 기치로 이미 1850년에 일어난 태평천국의 난에서 내 걸었던 기치이기도 하다. 결국 중국은 만주족을 내몰고 한족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목표였으며 일본은 그런 중국의 속셈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